인물과 사상 22: 지식인과 대학 - 개마고원 (2002-04) (읽음: 2002-08-11 11:33:01 PM)

- 강준만 지음

 

- "지식인들이여‘상징'에서‘실질'의 세계로 나아가자
이 땅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녀들을 일류대학에 보내고자 한다. 일류대학에서 일류교육을 받게 하기 위함일까. 아니 그보다는 기존의 '성공 법칙' 때문일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고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류대학을 나와야 한다. 사람의 됨됨이와 실력보다는 출신학교를 먼저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데 이 사회는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학은 학문을 가르치는 장으로서의 기능보다는 '계급 상승'의 장으로서 기능하는 면이 훨씬 크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의 비밀이 있다.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류대학에 가야 하고,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교육시스템에 순응해야 한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설파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 순응의 과정을 거쳐야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의 대학은 바로 이러한 '계급투쟁' 차원의 기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상징'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이 '상징'적 성격이 강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지식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은 굳이 기존의 질서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이 사회가 그들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이름과 권위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계급투쟁'보다는 '인정 투쟁,' 그러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 애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정 투쟁'의 주된 장이 되는 각종 언론 매체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힘쓰게 되는데, 그 언론 매체들은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지식인들은 개혁과 진보를 부르짖게 되더라도 기본 토대를 존중하는 선에서 하게 된다. 현실세계와의 구체적인 충돌은 피하는 그야말로 '상징적인 몸부림'만 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가장 앞장서야 할 지식인들이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대학과 지식인들이 결국은 보수적인 자리에 설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다. 저자는 먼저 지식인들의 '인정 투쟁' 방식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한국의 대학은 '상징'의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에 대학교수들이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 사회의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들이 한국형 '계급투쟁'의 과실에만 무임승차해 '상징'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실질'의 세계로 나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수성을 깨고 좀더 선진화될 수 있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 지식인과 대학 
비열한‘노무현 죽이기’수법을 고발한다 
대학 졸업을 대통령의 필수 자격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벌주의자들의 궤변에 대한 반론이다. 그리고 그 반론의 차원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KS이데올로기'와 그걸 뒷받침해주는‘공포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학벌과 관련된 그야말로 졸렬한 '노무현 죽이기' 수법에 대한 저항은‘기회 균등’차원에서는 물론 이 나라의 제대로 된 교육개혁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일임을 주장한다. 
이어령의‘영광'과‘고독’ 
한국 지성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어령의 활동과 이론에 대해 나름대로의‘기록과 평가'를 하기 위한 시도의 글이다. 저자는 1950년대‘혜성과 같이 나타난 문단의 무서운 테러리스트'라는 평을 들으며 등장한 이어령이 지난 50여 년간 걸어온 길을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김동리와의 논쟁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화부장관과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공직에서 일할 때의 일들까지 학자로서의 이어령, 공직자로서의 이어령, 인간 이어령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원고지 430매에 이르는 분량으로 정리했다. 저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으로서 지켜야 할 일관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물론 지식인에게도 노선이나 생각을 바꿀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왜 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실한 해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지식인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그 어떤 결과 또는 영향력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 이어령은 분명 비판받을 점이 있다고 말한다. 
대학은 지식인의 무덤인가 
데이비드 브룩스의『보보스』와 노엄 촘스키와 미국의 여러 학자들이 쓴『냉전과 대학』, 이 두 권의 책에 실린 지식인 관련 글에 대한 해설이다. 점점 정치인과 자본가를 닮아가고 있는 지식인들, 지식인의 무덤으로 기능하고 있는 대학을 거론한다는 것은 과거 '상징'으로만 기능했던 지식인의 역할과 개념이 소위 '실질'을 숭상하는 역할로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스스로 달라진 점을 밝히지 않고 실리와는 무관한 '학자'인양만 한다면 지식인의 '상도덕'이 지켜지는 일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의 '상도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은 뒤로 한 채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만 이전 투구할 것이다. 

▲ 외부 기고 
나의『동아일보』절독기 / 유시민 
'동아 광고 사태'가 있었던 중학생시절부터 애독했던, 그후로도 개인적으로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동아일보를 급기야 구독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 사연을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경쾌한 필치로 써 내려간 글이다. 먼저『동아일보』전 명예회장 김병관의 탈세사건 재판 최후진술을 인용하며,『동아일보』의 병증을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가 구독을 중단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9.11테러 이후 햇볕정책에 대한 비아냥, 김대중 정부의 외교정책이 곤경에 빠진 것을 즐거워하는 듯한 무책임한 논평 등『동아일보』의 대북정책 관련 보도들에 대해 비판한다. 
9.11참사,“나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진 
9.11 이후 세 번의 비행기 여행을 하며 저자가 직접 경험한 아메리칸 지상주의, 유색인 차별주의, 교묘한 미국 언론에 대해 쓴 글이다. 9.11이후 더욱 도드라지게 된 아메리칸 중심주의는 미국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비 로열 미국인-이민자'들과 외국인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누가' 테러를 일으켰나를 밝히는 데 급급하여 '왜' 그러한 테러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성찰은 하지 않고 있다. 찾아볼 수 있는 건 한껏 고조된 미국인들의 애국심뿐이다. 
'사오정세대'는 미래가 두렵다 / 신광식 
'45세에 정년'을 해야 한다는 의미의‘사오정 세대.’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져 '사오정'이 되어야 할 판에 재취업제도는 회사도 국가도 나 몰라라 하고, 국민연금과 퇴직금으로는 도무지 노후계산이 되지 않는 암담한 40대의 어려움에 대해 써 내려간 글이다. 

▲ 대학이 장악한 문학 
대학은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대학이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문학평론가의 절대 다수가 대학교수 또는 강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글쓰기'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서, 또‘글쓰기'만으로는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줄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 서서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평론가들이 대학에 매어 주체적인 비평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의식이 결여된 비평이 나오고 섹트주의가 판치고, 나아가 알 수 없는 외국어를 나열하여 일반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다분히 현학적인 비평이 범람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인 문화를 보수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타락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하는 문제다. 
다시 문제는‘문학권력’이다 
신춘문예 제도가 문인 지망생들에게 기존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순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문제삼은 글이다. 신춘문예 제도도 대학의 경우처럼 상징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기존의 '자기 검열'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터파크 책소개글)



- 그간 월간지를 읽느라 조금 오래 보지 않았던, 시간 좀 지난 책이다. 그러나 역시 계간지? 단행본? 하여간 이 책은 건질 내용이 많다. 300페이지가 넘는 좀 두꺼운 책이라 중간에 지루하고 따분한 글들도 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 "이어령의 '영광'과 '고독'에 대해"라는 글에서 강준만 교수가 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보는 순간, 뭔가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제 진보는 행태까지 포함한 종합 게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적 삶에서 대단히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진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믿는 신념과 관련된 독선까지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열려있는 논쟁'으로 얼마든지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사람의 독선이지 확고한 신념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지난번에 나는 어느 게시판엔가 '성인'들의 오만과 독선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왜 성인이 비성인보다 더 오만하고 독선적인가. 그건 곧 성인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라는 식으로. 거기서 한 가지 놓친 것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한다. '확고한 신념'... 그것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할 필요는 있을 듯 하다. 

- 역시 이어지는 의미이기도 한데, "강내희의 '문화공학론'에 대해"라는 글 말미에 나온 다음과 같은 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나는 '문화특권주의'와 '지식폭력'도 문화적 실천을 하고자 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눈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그렇게 제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실천의 반 이상은 이루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강내희의 말대로, '관점이나 입장 천명에만 의거해서 자신의 진보성을 입증하려는 경향'에 종지부를 찍고 좀더 실천적인 '개입'을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자." 

그렇다. 관점이나 입장 천명으로 나의 진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 나의 허위의식이 아니었을까. "실천적인 개입"을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이것이 정말 그동안의 '운동의 관점을 견지하고 살고자 할 때의' 딜레마가 아니었던가.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 '고즈넉하다' 라는 표현이 나의 가슴을 움직였다. 참...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렇다... 뉴맨인사뉴도 매우 고즈넉하다. "한없이 소박하고 수수무탈한 현상은 나에게 깊은 적막감과 비애를 느끼게 한다." 어떤 날카로운 문제의식도, 삶에 대한 치열한 자기 고민도 없다. 그저 소박하고 고즈넉한 마을 풍경만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아니다. 회피일 뿐이다!





Posted by 떼르미
,


자바스크립트를 허용해주세요!
Please Enable JavaScript![ Enable JavaScrip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