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 학연 등의 연고주의 타파를 지치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부르짖는 강준만 교수의 끈기와 인내에 찬사를 보낸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원래 내 성격이 그래서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겠지만 주위 대부분의 연고를 끊어(!)버린 나같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 나는 동문회도, 동창회도, 그 어떤 끈(?)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 연고주의의 공공성을 강조하여 '건전한' 연고주의를 이룩하자는 그의 주장에 동감한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한국 사회가 조금이나마 더 발전할 것이라는 진단에도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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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www.sun4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626

 

심상정의 ‘당당한 아름다움’  
[강준만 칼럼] 
 
 2008년 12월 01일 (월) 08:29:53 강준만  kjm@chonbuk.ac.kr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나중에 내 글쓰기에 써 먹으려는 심보로 인상적인 대목에 꼭 밑줄을 긋고 책의 제일 뒷면 여백에 키워드와 페이지를 표기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걸 컴퓨터에 각 키워드별로 입력해둔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연고주의’라는 키워드로 소중한 증언을 몇 개 건졌는데, 그 책은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의 최근 저서 『당당한 아름다움』(레디앙)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감동적이다. 특히 심 대표가 연고주의를 정면 대응하는 모습은 깊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튀려는 과장’과 ‘오버’에 뜨겁게 덴 경험 때문인지, 심 대표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혈연, 지연, 학연 순으로 도착한 축하 화환’이란 제목의 글을 보자. 제17대 총선(2004년 4월 15일)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었을 때의 일이다.

 

“선거 다음 날 당사에 출근하니 축하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 섰다. 그 가운데 나를 축하하는 낯선 화분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부 이씨 종친회? 한참을 더듬고서야 시댁이 고부 이씨라는 걸 떠올렸다. ‘청송 심씨 종친회’였다면 금세 알아차렸으련만. 시댁 쪽이라야 기껏해야 가까운 친척 정도 인사를 텄지 종친회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심씨 일가가 보낸 화분은 한 시간 후쯤 도착하였다. 다음날 오전에 파주 향우회, 점심때쯤 서울대 동창회가 보낸 화환이 도착하였다. 여성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나도 종친회니 향우회니 하는 데는 어르신이나 장남들이 챙기는 곳이라는 정도의 생각이 전부였다. 게다가 노동 운동을 하고 수배 생활을 하느라 오랜 세월 평범한 일상과는 떨어져 있었다. 몇 년전부터 역사학과 동기들 모임에 몇 번 얼굴을 내민 것 외엔 동창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터였다. 이렇게 낯선 축하를 연이어 받은 나는 얼떨떨했다. 더구나 화환이 도착한 것도 어쩜 혈연, 지연, 학연 순서였다.”(67쪽)

 

심 대표는 “의정 활동 기간 향우회, 동창회, 종친회에서 때마다 초청장이 오고 자리마다 불러 주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며 “연고의 위력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고 했다.

 

“강연을 마친 뒤 쫓아 나와 악수를 청하는 분들은 십중팔구 청송 심씨거나 고향의 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노동운동을 할 때도 강연을 많이 다녔지만 그때는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짧은 의정활동과 선거를 겪으면서 현실 정치에서 혈연, 지연, 학연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역시 크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연고’야말로 사회적 자산 형성이 취약한 여성 정치인들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었다.”(69쪽)

 

심 대표는 2006년 국정감사 때 외환은행 불법 매각을 배후 조종한 혐의를 받은 론스타 존 그레이켄 회장과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김영무 씨를 증인으로 신청한 바 있지만, 부결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심 대표는 김앤장의 위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는데, 그 위력 역시 연고를 매개로 한 것이었다.

 

“김영무 변호사가 같은 파주 출신이라고 파주 쪽에서도 봐달라는 전화가 왔다. 심지어 법조계에서 일하는 후배한테 15년 만에 걸려 온 전화의 용건도 그것이었다.”(95쪽)

 

이게 바로 한국정치, 아니 한국적 삶의 현실이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회적 관계망 가입비율은 동창회가 50.4%로 가장 높고, 종교단체 24.7%, 종친회 22.0%, 향우회 16.8%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공익성이 짙은 단체들의 가입률은 2%대에 머물렀다. 이 정도면 ‘민주 정치’가 아니라 ‘연고 정치’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자,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연고 정치’로 인해 불이익을 겪는 사람은 여성 정치인만이 아니다. 진보정당도 불이익을 겪고, 연고가 약한 세력도 불이익을 겪는다. 가장 중요한 피해자는 정치를 통한 변화를 열망하는 다수 유권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일상적 삶에선 연고 그물망에 갇혀 있기에 각 개인·단체별로는 각개약진식 ‘연고 정치’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런 근본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한국정치에 대해 아무리 논해봐야 무슨 답이 나올 수 있겠는가.

 

‘연고주의 타파’는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자신조차 지키지 못할 구호를 외쳐대는 위선을 중단하고, 우리 모두 좀더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연고주의에 공공적 성격을 가미하는 ‘공공적 연고주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연고주의 이익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비웃고, 현실성이 있건 없건 ‘무조건 연고주의 타파’를 외치는 근본주의자들은 그건 타락이라며 분노한다.

 

지난 11월 20일 전북민언련이 주최한 15기 언론학교에서 심 대표의 특강을 들으면서 흐뭇했다. 심 대표는 연고주의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는데, 심 대표의 별명을 ‘심정직’이나 ‘심책임’으로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직하거니와 책임감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당당한 아름다움’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공공적 연고주의’를 널리 실천해 진보정당이 연고주의로 인해 겪는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연고주의의 공공성을 점점 높여 나가면서 한국적 현실에 잘 맞지도 않는 ‘서구민주주의 이론’에 찌들은 한국 민주주의론에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부는 걸 보고 싶다. 언론에 흘러 넘치는 각종 연고주의 관련 기사부터 공공성을 따져묻는 방식으로 조금씩 바뀌면 좋겠다. 헛된 꿈일까? 그러나 꿈 없이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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