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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강준만   
  
"한국은 매우 높은 '중앙·상층 지향성'을 갖고 있는 나라다.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근·현대를 거치면서 전통 귀족계급이 몰락했거나 크게 쇠락한 덕분에 한국인은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는 적잖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강준만, 『한국생활문화사전』, 인물과사상사, 2006, 260∼261쪽)

 

내 주장이다. 철학자 탁석산은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위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분석이 일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분석 이전에 문화는 연속적으로 변화하거나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진화한다는 현대 서양철학의 성과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문화에는 반드시 단절이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 한국문화에는 단절이 없으며 면면히 이어져오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믿음은 너무나 널리 유포되어 때로는 모순적인 발언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 단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한국이 어떻게 개항 이후 발전에 성공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탁석산,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창비, 2008, 27∼30쪽)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다만 '연속'과 '단절'을 양자택일로 보지 말고 둘 다 껴안는 게 좋을 것 같다. 연속도 있고 단절도 있다는 것이다. 탁석산도 뒤에 가서 "문화는 단절을 통해 진화하지만 때때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기도 하는 법이다"라고 말한 걸로 보아(탁석산, 위의 책, 203쪽) 이런 '둘 다 껴안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지는 않다. 

 

문화가 불연속적으로 진화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이유는 정치경제적 격변이었다.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게으름'이다.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치고 조선인들의 게으름을 지적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당시 조선인들은 느려 터진 게으름을 자랑했다. 그러나 당시 나라 밖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서울 정도로 부지런했다. 조선에선 부지런해봐야 그 과실을 양반계급에게 착취당하니 부지런할 필요가 없었던 반면, 조건이 달라지니 행태도 달라진 것이다. 즉, 민중을 착취한 양반계급 중심의 정치경제적 체제에서 벗어난 이들이 문화의 불연속적 진화를 온몸으로 실증해 보인 셈이다.

 

탁석산이 단절론을 강조한 건 이 책의 포인트라 할 실용주의를 구제하기 위해서다. 즉, "조선과 한국의 단절에서 주자학이 아닌 실용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탁석산, 위의 책, 151쪽) 탁석산은 "실용주의가 지난 1세기 동안 방법론으로서의 사상적 틀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과소평가되거나 오해받았다"고 주장한다. 도발적인 주장이다. 그래서 흥미롭다. 그런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좋음을 기준으로 하는 한국의 실용주의는 가변성과 수용성이 뛰어나다. 즉 인생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일 수 있고, 인생에 좋다면 언제나 변화를 택하기 때문이다. 진리나 정의도 좋음 앞에서는 순위가 밀리는 상황이므로 서양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 싸우는 일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진리나 정의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이 앞서기 때문에 인생의 즐거움에 좋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나쁘게 보면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 하지만 크게 보면 대중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시대상황에 맞게 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다음 단계에는 또 다른 것을 상황에 맞게 택함으로써 성공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탁석산, 위의 책, 139쪽)

 

이 주장에 대해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달리 볼 수 있는 면도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용주의에 대한 정의의 문제인가? "하나뿐인 이 세상, 한 번뿐인 이 세상, 즐겁게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그 무엇이든 택한다. 이런 정신이 실용주의다."(탁석산, 위의 책, 126쪽) 이게 실용주의라면 중남미 사람들이 한국인보다는 한 수 위가 아닐까?

 

탁석산이 실용주의의 사상적 배경으로 지목한 현세주의도 '현세'의 범위와 성격이 문제일 것 같다. 입시전쟁을 보자. 그건 현세주의의 극치지만, 자녀의 승전(勝戰)을 위해 부부간의 성생활까지 자제한다는 학부모가 40%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노래방 도우미의 36.8%가 가정주부이며, 이들이 도우미를 하는 주요 이유가 자녀의 사교육비 때문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온갖 고통과 희생을 마다 않는 '기러기 부부'는 어떤가? 아무리 봐도 이걸 실용주의라고 부르긴 어려울 것 같다.

 

서양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 싸우는 일이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건 '죄의식 문화'냐 '수치심 문화'냐 하는 관점에서 볼 일이다. 또한 한국의 이중 문화 체제에서 공적 영역은 명분과 이념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갈등과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탁석산은 이마저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데에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이나 보수는 겉으로는 거창한 문제로 보이지만 대중에게는 개혁과 보수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혁신 논쟁이 치열하고 진지해 보이지만 대중은 한 가지 기준으로 본질을 직시한다. 인생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에 맞는 선택지를 택한다는 것이다. 진보의 물결이 필요한 때라면 진보를 택하고, 보수가 필요한 시기에는 보수를 택한다. ……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하면 지나치지만 지식인 사회 그리고 언론에서 논의되는 진지함을 대중도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탁석산, 위의 책, 141쪽)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한국인'의 범주에 정치인·언론인·지식인은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수는 적을망정 이들의 한국인 자격을 박탈하면 섭섭해하지 않을까?

 

이 책의 제목은 "한국 대중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런데 대중의 경우에도 '허세' '인정투쟁' '구별짓기' 등이 과잉 발달돼 있어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게 많다. '학벌'로 대변되는 서열문화도 실용이라고 봐야 할까?

 

한국이 어떻게 개항 이후 발전에 성공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꼭 '실용주의'라는 답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실용주의적인 면이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걸로 싸잡아 이야기하기엔 그 성격이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탁석산의 주장을 배격할 일은 아니다. 다소 무리가 있는 점도 있을망정 그의 참신한 시각은 재미있거니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강준만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9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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