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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수: 그의 1석에 거는 기대 / 최을영   

 

탈환 
  
2004년 울산 북구는 진보정치의 1번지로 불렸다. 이때 울산 북구는 경남 창원 을과 함께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교두보였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경남 창원 을의 권영길, 울산 북구의 조승수 등 2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로 8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돼 무려 10명이 원내에 진출했다. 
 
그러나 2005년 조승수가 사전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당한 뒤 울산 북구는 한나라당의 텃밭이 되고 말았다. 재보선에서도, 또 2008년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이 지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2009년 4월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진보신당의 조승수가 울산 북구를 탈환하면서, 울산 북구는 다시 한 번 진보정치의 1번지라 불리게 되었다.

 

울산 북구의 탈환은, 또 조승수의 승리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조승수의 승리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후보 단일화 논의를 거쳐 이뤄낸 것이라는 점에서 2008년 분당된 두 당 간의 연대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더구나 2008년 분당 당시 누구보다 먼저 조승수가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와 이른바 종북주의 논란에 불을 붙였고, 이 때문에 조승수에 대한 감정이 민주노동당의 상당히 좋지 않았음에도 연대가 이뤄진 것을 볼 때 이번 후보 단일화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둘째는 조승수의 당선이 진보신당의 원내 첫 진출이 되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과의 분당 이후 원내에 진출하지 못했던 진보신당은, 조승수의 당선으로 원내에 다시 진입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다시금 진보정당의 정치 실험에 불씨를 당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1명에 불과하지만 조승수의 당선은 국회 내에서의 정보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과 정책 연구에 대한 경제적·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진보신당의 정책을 펴나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터이다. 조승수가 자신의 당선을 두고 "진보신당이 정치적 시민권을 비로소 획득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1) 
  
  
최연소 구청장 
  
사실 조승수는 2004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으로 함께 당선됐던 최순영, 심상정, 노회찬, 강기갑, 천영세, 단병호 등보다 덜 알려져 있는 듯하다. 당선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그가 사전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10명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중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그와 권영길뿐이었다. 지역구에 나설 정도로 그는 일찌감치 울산 북구에서 시민운동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런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울산시의원, 울산 북구청장 등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63년 1월 22일 울산 울주에서 태어난 조승수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인생 전환기는 고등학교 때였다. 흥사단 활동을 하던 조승수는 운동권 서적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1982년 동국대 2학년 재학 시절에는 군부독재 반대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돼 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일로 그는 학교에서도 제적되었다. 이듬해 8·15 특사로 풀려난 그는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가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고, 1986년까지 울산과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1986년 인천 한양공영에서 일하던 그는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투쟁을 벌이다 해고되었고, 몇 달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11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87년 감옥에서 6월항쟁을 지켜보던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1987년 출소 후 울산에 사회과학서적을 판매하던 '신새벽서점'을 연 그는 1989년에 일어났던 현대중공업 파업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1990년부터 2년 동안 수배자 생활을 하게 된다. 수배가 해제된 뒤 조승수는 백기완이 이끄는 민중당에서 활동하며 진보정치운동에 나서는 한편 1990년대 초반 울산에서 일찌감치 시민운동가로 명망을 떨치게 된다. 울산 참여자치시민연대 출범에 일조하는 등 일찌감치 시민운동과 환경운동에 나선 그는 1995년 민주노총의 지원을 받아 울산시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998년 6월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노총의 지지하에 초대 울산 북구청장에 당선됐다. 최연소 구청장이었다.

 

울산 북구청장 재임 시기 조승수는 여러 개혁적인 정책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우선 그는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에 집중했다. 전자결재제도를 과감히 도입해 결재를 간소화했고, 행정기관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계도지 구독을 중단했다. 지방지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지만 조승수는 계도지 구독에 들어가던 예산지원을 없애고, 이를 실직자와 서민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또 기초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처음으로 공무원 노조 출범 지지성명을 발표해 행정자치부로부터 경고조치를 받기도 했다. 북구청장 재임 초기에는 노동운동가, 시민운동가 출신이어서 노동계에 편향된 정책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으나 이런 여러 개혁적인 정책을 펼쳐나가며 조승수는 울산 북구청의 행정 기반을 안정적으로 닦았다는 평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한국행정학회가 주는 베스트 자치단체상을 받기도 했다.

 

 
꺾인 날개 
  
울산 북구청장에 재임하면서 조승수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는 한편 1999년에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진보정당 창당을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창당 멤버로 활동한 그는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전체 투표자의 46.9%의 지지를 얻어 한나라당의 윤두환(34.4%), 열린우리당의 이수동(17.7%)를 제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조승수의 당선에는 30∼40대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60%가 넘고, 대부분의 유권자가 현대자동차와 하청업체 노동자라는 지역적 특성과, 울산 북구청장으로 재임하면서 얻은 신뢰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울산 북구는 전국 243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민주노동당이 정당 득표 1위를 차지한 곳이 됐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조승수는 "국회에 들어가면 소외받는 노동자 서민의 대변자가 되는 것은 물론 국민의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는 악법을 개정하는 데도 최선을 다할 것"2), "국회의원의 각종 특권을 반납하는 등 기존 정당 의원과는 차별화한 모습을 보이겠다"3)라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고통과 관련해 제일 중요한 과제로 비정규직 문제를 꼽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한국적인 진보정당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으면서, 민주노동당이 대중정당이면서 정책정당을 지향해야 하며, 정책 개발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대 국회에 입성한 조승수는 이렇듯 포부가 많았다. 그러나 선거법 위반(사전선거운동)이 발목을 잡았다. 2004년 12월 30일 울산지법 형사합의부는 17대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조승수에게 벌금 150만 원을 선고했다. 법정 선거운동 기간을 하루 앞둔 2004년 4월 1일 울산 북구청의 음식물 자원화 시설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 간담회에 참석해 "주민 동의 없이 음식물 자원화 시설을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발언한 것이 문제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선거를 앞두고 주민들의 음식물 자원화 시설 반대집회에 참석해 시설 건립을 막겠다고 약속한 것이 통상적인 정당활동으로 볼 수 없고 당선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밝혔다.4)

 

조승수는 즉각 항소했지만 2005년 3월 23일 항소심에서도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150만 원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다른 의원들이 벌금 100만 원 미만을 선고 받은 것에 견줘 조 의원에 대한 형량이 너무 가혹하다"며 탄원서와 이에 서명한 3만여 명의 명단을 대법원에 제출했다.5) 국회 내에서도 조승수 구하기에 나섰다.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과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114명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강금실 전 법무장관, 이용훈 전 대법관, 박원순 변호사 등 변호사 56명으로 구성된 공동변호인단을 구성돼 조승수 구하기에 나섰다. 
 
그러나 2005년 9월 29일 대법원이 150만 원 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조승수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그와 함께 조승수가 발의한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전기, 가스 등의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는 국민에게 국가가 에너지 사용을 보장해주는 에너지 기본권의 내용이 포함된) 에너지 기본법은 물 건너갔다. 그리고 조승수가 준비하던 원폭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도 빛을 보지 못했다. 
  
  
종북주의 논란 
  
2008년 민주노동당은 일명 자주파와 평등파 간의 분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분쟁은 결국 진보신당 창당으로 이어졌는데 그 일선에 섰던 이가 바로 조승수다. 2006년 민주노동당 대표 경선에 나섰다가 낙선한 조승수는 민주노동당 창당 7주년을 맞은 2007년 초에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민생과 사회경제적 평등의 문제에서 자기 역할을 못했다"며 "왜 당을 만들었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라고 비판했다.6)

 

그리고 2007년 대선에서 참패하자 조승수는 민주노동당의 쇄신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비판에 나서게 된다. 그는 2007년 12월 25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다소 거친 표현을 써가며 민주노동당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 19일을 기점으로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을 71만 2121표 정당, 정규직당, 친북당, 회계부정 공모당, 자기들끼리 싸우는 당으로 확인시켜줬다. …… 71만 2121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으로 다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당으로 할 것인지 하는 문제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북한의 군사 왕조정권을 보위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로 통일하는 것을 자신의 최고 임무로 하는 세력과는 진보정당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민주노총의 배타적 방침에 안주하여 돈과 표를 얻는 대신 그들의 잘못에는 침묵하는 비겁한 거래를 중단해야 한다. 조직노조 운동을 올바르게 세우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회연대를 추진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지구 온난화에 대비하고 생태적 생활방식의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진보일 수가 없다. …… 진보다운 진보정당이 지금의 민주노동당이라는 틀 안에서 가능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고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이것을 판단하면 된다."7)

 

이 글을 기고한 이후에 조승수는 민주노동당 내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해 계속 비판하며 민주노동당의 쇄신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렇게 종북주의 논란은 시작됐다. 더구나 2007년 12월 27일 『조선일보』에 「"친북 세력과 결별해야 민노당에 미래 있어"」란 제목의 조승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자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져갔다. 민주노동당 대변인실과 자주통일평화위원회가 비판 논평을 발표했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민주노동당을 항의 방문해 "반통일 반노동 선동지인 조선일보 인터뷰를 통해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선동하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조국통일 사업을 음해하는 발언을 했다"며 조승수에 대한 문책을 요구했다.8)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 대해 조승수는 "당 방침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인데 이를 주지시켰고 곤란하다고 했는데 기존 언론에 나왔던 말을 확인하기 위해 해줬던 것"이라며 "특별히 조선일보에 전화를 한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기자에게 전화가 와서) 망설이기는 했는데 사실 확인을 한다고 해서 간단히 언급했다"고 그 경위를 밝혔으나 비판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9)

 

조승수가 불러일으킨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논란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민주노동당 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데 민주노동당 내의 자주파 전체를 종북주의로 규정했다는 것이 주요 비판의 요지였다. 또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종북주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넘어, 당을 종북주의라는 언어 프레임에 가둬버렸다"고 비판했다.10)

 

결국 조승수는 2008년 2월 1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토건삽질을 막아내겠다 
  
앞서 본 것처럼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조승수는 껄끄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종북주의 논란의 주역이자,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며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일부 인사들이 후보 단일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후보 단일화를 위해 진보신당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았고,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후보 단일화를 이뤄냈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조승수는 "국회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자 감세, 재벌 감싸기, 특권층 편들기를 바로잡겠다. 4대강 정비 등 MB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시대착오적 토건삽질을 막아내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또 "원내외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양대 진보정당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진보정치 세력이 MB 정권에 맞설 유일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갈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포부도 내비쳤다.11)

 

조승수는 원외에서 떠돌던 진보신당을 원내에 입성시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앞으로 진보신당과 조승수가 어떤 활동을 펼칠지 지켜볼 일이다. 
  
최을영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9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  주  |------------ 
1) 안홍욱, 「진보신당 '1석의 힘' 원내 진입 첫 브리핑」, 『경향신문』, 2009년 5월 8일, 4면.
2) 정재락, 「화제의 당선자 울산북 조승수」, 『동아일보』, 2004년 4월 16일, 18면.
3) 정진황, 「4·15 총선/ 민노당 당선자 면면」, 『한국일보』, 2004년 4월 16일, 12면.
4) 유재권, 「조승수 의원 벌금 150만원 울산지법, 선거법 위반혐의 선고」, 『세계일보』, 2004년 12월 31일, 9면.
5) 김광서, 「민노당 울산시당 "울고 싶어라"」, 『한겨레』, 2005년 6월 9일, 13면.
6) 박영환, 「위기의 민노당/ 창당 7년… 약속했던 '다른 정치' 왜 희망 못 주나」, 『경향신문』, 2007년 1월 31일, 1면.
7) 조승수, 「시론: 민주노동당, 다시 광야에 서라」, 『경향신문』, 2007년 12월 25일, 31면.
8) 류정민, 「살얼음판 민노당, 심상정의 고민」, 『미디어오늘』, 2007년 12월 27일(인터넷판).
9) 류정민, 「"조선일보 인터뷰 금지 알았지만…"」, 『미디어오늘』, 2007년 12월 27일(인터넷판).
10) 이지은, 「갈림길 선 진보정당/ '진보대안' 힘도 못 써본 채… 정파갈등 폭발 '분열 위기'」, 『한겨레』, 2008년 2월 5일, 3면.
11) 류정민, 「조승수 "MB정부 '토건삽질' 막아내겠다"」, 『미디어오늘』, 2009년 4월 30일(인터넷판).  
  
2009/05/18 [14:30] ⓒ인물과사상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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