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4월 2일] 우뇌(右腦) 민주주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①정당이 공천을 외부인들에게 맡기는 ‘자해(自害)’를 저지르면서 그걸 ‘개혁’이라 부른다 ②정당 대표마저 외부 심사위원들이 주관하는 면접시험을 치르면서 그걸 자랑으로 내세운다 ③언론은 ‘공천 혁명’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일부 시민은 감격에 몸을 떤다 ④외부인들에게 맡겼다는 공천이 묘하게도 권력 실세 위주로 이루어진다 ⑤공천에서 탈락한 정치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⑥박근혜는 “사적 감정에 의한 표적 공천”을 비난하면서 “살아서 돌아오라”고 외친다 ⑦박근혜가 “공천 속았다”고 하자, 강재섭은 “출마 않겠다”로 받는다 ⑧탈당 의원이 당선되면 복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⑨전직 대통령들이 부정(父情)을 앞세워 훈수를 둔다 ⑩현역 의원 ‘물갈이 경쟁’만 있을 뿐 정책 경쟁은 없다.

 

■ 감성과 직관이 지배하는 총선

 

내가 뽑아본 제18대 총선의 진기록 ‘베스트 10’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우뇌(右腦) 민주주의’라는 걸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좌뇌는 논리와 이성, 우뇌는 감성과 직관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국정치는 감성과 직관의 지배를 훨씬 더 많이 받으므로 ‘우뇌 민주주의’로 부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국정운영의 총사령탑이라 할 청와대의 업무 인수 인계를 보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폭들이 관장 구역 인수 인계를 해도 그것보다는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왜 이 나라의 대통령들은 당선되기만 하면 자신이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듯, 꼭 ‘원조(元祖)’가 되려 하고 ‘원년(元年)’을 선포하기에 바쁜가? 좌뇌가 없고, 오직 우뇌 일변도의 감성과 직관으로 해보려는 기질 때문은 아닐까?

언론의 정치저널리즘을 보라. 아무리 우리 신문이 고급지와 대중지의 분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곤 하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스포츠 저널리즘’과 ‘연예 저널리즘’의 보도 프레임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독자의 오락생활에 기여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정치가 단지 그런 엔터테인먼트 용도로만 탕진되어도 괜찮은 건가?

언론과 지식인은 정치를 비판할 때마다 유권자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런 것인지 그것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유권자들 역시 바람에 약하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우뇌적 사고에 능한지라, 이미 그걸 간파한 정치권이 유권자들에게 영합하는 ‘쇼’를 한다고 보는 게 옳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인물이 크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람과 분위기가 지배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급변의 소용돌이에선 누구건 다 돌아가면서 망가지거나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오랜 역사를 두고 형성된 국민적 기질인지라 한국의 ‘우뇌 민주주의’가 쉽사리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우뇌 민주주의’의 장점에 주목하면서 그걸 키우는 방향으로 애를 쓰는 게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 우뇌적 사고는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데에 강하다.

한국 유권자들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큰 흐름을 읽는 데엔 비교적 유능하며, 이는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큰 흐름’에만 현명하기 때문에 개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이 그런 흐름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 그 장점을 키우는 게 대안일까

 

한국은 경륜이 존중 받을 수 없는 사회다. 경륜은 타락의 증거로 간주된다. 한국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역사에 뻐길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 중의 하나다. 한국인이 ‘새것’이라면 환장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과 암묵지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이 있는 반면, 과감한 혁신에 능하다. ‘우뇌 민주주의’는 한국정치의 저주이자 축복이다.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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