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7월 2일] '이념'과 '이익'의 유착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은 ‘명분 중독증’에 걸린 ‘이념과잉’ 사회다. 한국은 명분이나 이념이라는 공적 가치를 소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사적 이해관계로 대치하는 ‘각개약진 공화국’이다. 이 두 진술은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과 이념에 대해 조금만 신축성을 보이면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편의 명분과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소통은 물론 타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명분ㆍ이념에 자신의 사적 이익을 다 걸었기 때문이다.

 

소통ㆍ타협 배척의 주요인

 

그렇다고 해서 명분ㆍ이념이 순전히 빈 껍데기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많지만, 명분ㆍ이념이 진실한 신념이라는 걸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신의 명분ㆍ이념이 승리할 때에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된다는 데에 있다. 그 관계를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명분ㆍ이념이 진실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것이라면 소통과 타협을 배척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명분ㆍ이념은 사적 이익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명분ㆍ이념이 곧 절대적인 목표가 된다. ‘명분중독’과 ‘이념과잉’이 나타나는 이유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며, 정도의 차이일 뿐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외면할 게 아니라, 그 사회적 중요성에 주목해 우리의 문제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적 이익은 넓은 개념이다. 자신이 주도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인정욕망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주연 강박증’은 ‘이념’의 영역인가, ‘인격’의 영역인가? ‘인격’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정욕망이 강한 사람이 사교술은 물론 헌신성도 뛰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말하는 공적 영역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우리는 평소 ‘국회의원 모독’에 익숙하지만, 국회의원들은 모두 다 자기 동네에선 탁월한 리더십을 행사했던 사람들이다. 인격의 사적 영역 중심으로 말하자면, 대부분 훌륭한 인격자들이다.

그런데 왜 국회의원들은 욕을 먹는가? 이념 때문인가, 인격 때문인가? 욕을 먹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인 기회주의는 이념인가, 인격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무리수를 저지르는 탐욕은 이념인가, 인격인가? 이런 질문은 사적 영역을 몰수해 버리고, 이념을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인가? 기회주의와 탐욕이 시대정신이 되면, 그걸 개인의 인격 문제로 돌리긴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더 하거나 덜 한 개인차는 존재하며, 그걸 따지는 게 무의미한 건 아니다.

학구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보통 개념 정의를 먼저 내리고 어떤 주제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는데, 세상사를 논하는 데엔 그게 꼭 좋은 방법은 아니다. 누군가의 인격을 공론장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일은 어차피 없을 터인즉, 인격의 정의는 각자 스스로 내리면 된다.

 

이념에 인격이 치여서야

 

‘이념’도 좋고 여러 장점이 있기는 한데, 다른 큰 문제점이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화만 내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자기 절제를 못하는 사람, 아랫사람을 잔인하게 다루는 사람,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 등을 대할 때에 누구건 ‘이념’과 ‘인격’ 사이에서 고민해 보지 않을까?

비상한 상황에선 ‘이념’ 위주로 판단하는 게 불가피한 점이 있겠지만, 그런 세월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그게 문화로 자리잡아 비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인격’을 사소하게 여기게 된다. 이런 통념을 재평가해 보자는 것이다. 고종석 논설위원이 6월 26일자에 쓴 <인격이 사교술이 아니라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고 해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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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고종석 칼럼/6월 26일] 인격이 사교술이 아니라면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인격에 관한 한, 나는 늘 내 발밑이 불안하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인격’을 입에 담는 것을 삼가왔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의 6월 18일자 칼럼 <인격은 사교술이 아니다>가 내 6월 12일자 칼럼 <손호철과 강준만에 잇대어>에 대한 비판적 논평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내 인격에 대해서 잠시 눈을 꼭 감고, 용기를 내서, 인격 얘기를 이어가 본다. 
사실 마음 한 구석엔 비생산적 대화라는 거리낌이 있다. 내 판단에 강 교수의 글과 내 글은, 서로 맞버티는 듯 보이지만, 엇비슷한 세계관이 서로 다른 각도로 한국사회에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 겉도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 교수는 특정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내 말에 공감을 표하긴 했으나, 그 공감이 흔쾌한 공감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인격’의 판단을 그가 그리 어려운 일로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극단적인 사례’라고 방어벽을 치긴 했으나, 5년 전 어느 ‘개혁’ 정당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 은폐와 그 즈음 문단에서 일어난 ‘범죄행위(에 가까운 인격적 일탈행위)’를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 사례를 두고 당사자의 인격을 판단하긴 쉽다. 그러나 이념과 인격의 괴리 문제가 인격의 그런 극단적 타락에서 말미암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인격의 공정 영역과 사적 영역

 

강 교수는 주변사람들에게서 험담을 안 듣는 사람의 인격이 평균인의 인격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인격은 사교술이 아니라고 일갈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좀 멍해졌다. 그의 말이 지당해서이기도 했지만, 내가 그를 잘못 읽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강 교수가 인격의 중요성을 힘줘 말했을 때, 나는 그가 인격은 (사적 영역만이 아니라!) 공적 영역을 아우르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인격’의 사적 영역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것이다.

물론 인격은 사교술이 아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사교술이기도 하다. 만약에 인격이 순전히 공적 영역이라면, 그것을 이념과 구별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복거일씨나 이문열씨에게 화가 난 것은, 내 판단과 달리, 그들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인격’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에 이념과 인격을 구분하려는 노력의 실익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느 이념이건 그 실천이 그 신봉자의 나쁜 인격에 의해 왜곡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강 교수의 제안도 뜻을 거의 잃을 것이다. 인격을 공적 영역에 가둘 때,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던 스탈린은 자신의 (공적인) ‘너저분한 인격’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거나 타락시킨 게 아니다. 그는, 인격에서든 이념에서든, 거짓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뿐이다.

 

명분의 홀대와 이념의 결핍

 

소위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이 대안교과서라며 지난봄 내놓은 <한국 근현대사>의 책임편집자 이영훈 교수는, 그즈음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유신체제의 해악은 (고작) 수백 명의 시민들에게 국회의원, 대통령이 될 권리를 한동안 제한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소문난 ‘실증주의자’의 반(反)실증주의적 언동도 어처구니없지만, 인격의 사적 영역을 경시할 때, 그의 (공적으로 ‘추레한’) 인격은 그의 (역시 공적으로 ‘추레한’) 이념의 속살일 뿐이다. 인격의 사적 영역을 몰수해버리면, 강 교수의 소망과 달리, 이념은 곧 인격이 되고 만다.

그건 그렇고 한국은, 강 교수의 생각처럼, 정말 ‘명분 중독증’에 걸린 ‘이념과잉’ 사회일까? 오히려, 그가 얼마 전 낸 책의 제목대로, (명분이나 이념이라는 공적 가치를 소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사적 이해관계로 대치하는) ‘각개약진 공화국’이 아닐까?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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