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7월 23일] 지방자치와 정치교육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서울시의회를 비롯하여 전국에 걸쳐 여러 지방의회의 한심하다 못해 처참한 현실이 조금씩이나마 터져 나오고 있다. 어느 신문은 “썩은 부위를 잘라내 풀뿌리 민주주의의 새 살이 돋게 해야 한다”고 했다.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과연 ‘썩은 부위’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썩은 부위’는 지방의회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썩은 부위’는 그 이전에 우리 유권자들의 머리 속에 있는 건 아닐까?
세계적으로 우리처럼 성급하고 파편화된 국민은 드물다. 민주주의란 끊임없는 교육으로 완성되는 것임에도, 우리에겐 그런 교육이 없다. 우리는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정치 선진국의 정치제도는 이것저것 수입해 쓰려고 하면서도 이 나라들이 오래 전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치교육’을 실시해왔다는 건 외면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투자 없이 단기간에 한판 승부로 변화를 이뤄내려는 조급증이라고나 할까?

 

썩은 지방의회 욕만 하지 말고

 

한국에선 무슨 교육이건 그것이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관점에서 평가된다. 철저히 파편화돼 있다는 뜻이다. 교육의 목적은 평생 써먹을 수 있는 ‘학벌 간판’을 따내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게 된다. ‘정치교육’은 ‘학벌 간판’을 따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물론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목숨 걸고 경쟁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독특한 경쟁 심리는 바로 그런 풍토의 산물일진대, 그것이 한국의 발전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면서도 그 모순을 바로잡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거대한 집단시위 축제판을 벌이는 것도 평소의 파편화된 삶에 대한 카타르시스 효과를 얻고자 함이지 무슨 심오한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학생ㆍ시민에게 정치교육을 시키는 게 어려운가? 아니다. 어렵지 않다. 전국에 걸쳐 각 지역의 지방의회를 집중적인 정치교육의 마당으로 활용하면 된다. 이는 정치교육 효과도 거둘 수 있는 동시에 지방의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기도 하다. 학생ㆍ시민이 조별로 나뉘어 지방의원 한 명의 활동을 1년 365일 내내 집중 탐구한다고 가정해 보라. 어디 감히 딴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이 건물 하나만큼은 으리으리하게 잘 지어 놓았기 때문에, 펑펑 남아도는 지방의회 공간을 활용하면 된다. 학생ㆍ시민들이 늘 상시적으로 지방의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지역 현안들을 챙기고 감시하고 제안하는 모습을 상기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유익한 일인가!

 

그 큰 공간을 시민교육장으로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들 특유의 “큰 것이 아름답다”는 심리 때문이다. 모두 다 크게만 놀려고 한다. 한판 승부를 꿈꾼다. 그래서 늘 중앙 이슈만 다루려고 하고, 자기 지역의 현안을 챙기는 건 좀스럽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큰 것이 아름답다”는 심리ㆍ행태가 바뀌지 않으면 지방자치는 무관심의 ‘혜택’을 누리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썩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 것이다.

민관(民官),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지방의회를 정치교육의 최일선 현장으로 활용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서면 좋겠다. 정치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지내다가 뒤늦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면 특정 인물에 대한 광신도로 변해 정치를 망치는 이들이 좀 많은가. 명심하자. 민주주의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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