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독재 권력’ 없는 ‘개발독재 논리’
강준만
“KBS의 경우 방송의 중립성 측면도 고려해야겠지만, 정부 산하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최적임자인지를 한번쯤 검증하고 재신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의 말이다. 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간주돼 큰 논란을 빚은데다 여당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던 바, 실언(失言)으로 이해하기로 하자. 이 발언이 실린 <신동아> 2008년 8월호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정작 눈길이 간 건 그의 ‘수도권 규제’ 관련 발언이었다.
“수도권 규제 문제도 좀 더 큰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중국의 자치성(省) 하나보다 작아요. 이 좁은 나라 안에서조차 수도권, 비수도권으로 나누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겠고요. …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동반 발전,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 정부에서 처럼 수도권에 있던 것을 빼내서 비수도권으로 이전하는 것은 낡은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완화할 수 있겠지만 전체 파이는 똑같지 않습니까.”
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왔다. 경남 마산에서 자라 부산고(이후 서울대 경제학과, 하버드대 정책학 박사)를 나왔다는 그가 ‘지방’보다는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애국심을 보인 것에 감동해야 마땅하겠건만, 한숨이 터져나온 건 어인 이유일까? 개발독재 논리! 그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경외감은 아니었을까?
개발독재 논리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문제는 대통령을 조롱하다 못해 모욕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촛불집회와 같은 자유가 만개된 오늘날 그런 논리가 작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하거나 인내하라는 건 옳건 그르건 독재체제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명박 정권의 비극은 ‘독재’를 할 수 있는 힘은 없으면서도 여전히 개발독재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에 하나 이명박 정권이 “우리나라 전체가 중국의 자치성(省) 하나보다 작은데 수도권, 비수도권으로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을 갖고 국정운영에 임하다 보면 앞으로 계속 난국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서울의 강남-강북 격차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우리나라 전체가 중국의 자치성(省) 하나보다 작은데 강남, 강북으로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해보라. 돌이 날아올 것이다. 지방 사람들은 워낙 순박해 가만 있는 것일 뿐이다.
지금 지방의 요구는 무조건 수도권에 있던 것을 빼내서 비수도권으로 이전하라는 게 아니다. 전체 파이를 키우지 못하면서 나눠먹기만 하자는 것도 아니다. 새로 투자ㆍ투입되는 돈과 인허가권이 수도권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지방을 살리는 데에 기업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대학이다. 거의 모든 이들이 자녀교육을 이유로 수도권에 집착하지 않는가. 대학이 급소다. 그런데 지금 서울 소재 대학들은 수도권에 제2, 제3의 캠퍼스를 짓느라 미쳐 돌아가고 있다. 대학 간 몸집불리기 경쟁이 살벌할 정도로 치열하다. 이건 정부의 교육예산 차등지원을 통해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음에도 역대 정권들은 오히려 그걸 장려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지방 분권에 목숨을 건 것처럼 굴던 노무현 정권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최악이었다. 왜 이 문제로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명박 정권은 더 이상 ‘상생’ 운운하는 말장난 하지 말고, 과거 그 어떤 정권도 시도할 시늉조차 내지 않았던 ‘교육 분권’부터 해보라. 나라도 살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독재 권력’ 없는 ‘개발독재 논리’로 계속 가다간 죽도 밥도 안된다.
강준만
(이 글은 2008년 8월 3일 <선샤인뉴스>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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