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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추억
[손호철 칼럼]<10> '자유주의세력'은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배신했나?
기사입력 2009-03-08 오후 4:58:10
초등학교 시절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을 괴롭히던 못된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와 이들과 한판 붙어 버릇을 고쳐놓기로 했다. "방과 후 학교 뒷산으로 나오라"고 이들에게 통보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뒷산으로 올라갔는데 정작 이들을 보자 함께 싸우기로 했던 친구가 겁을 먹고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그 결과 혼자 이들로부터 실컷 두드려 맞아야 했다.
잊었던 쓰라린 배신의 추억은 다시 떠오른 것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87년 양김의 분열, YS의 3당 통합, DJ의 JP와의 DJP 야합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의 역풍으로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호기 좋게 민주개혁을 위한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특히 반민주성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을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진영이 일제히 일어나 단식에 들어가는 등 대대적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데다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의석을 합치면 충분히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해찬 총리가 차기 대권을 겨냥해 지지자 결집에 나선 것인지 총리로는 적절하지 않게 한나라당에 대해 "차떼기당"이라고 공개적으로 조롱을 하고 나섰다. 가뜩이나 울고 싶은 차에 이총리가 빰을 때려주자 한나라당은 얼씨구나 하고 국회를 전면거부하고 나섰다. 결국 예산안 처리 등을 위해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안 등 개혁 법안들을 단독처리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서야 국회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천 명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가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데 노 대통령은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꾸겠느냐며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함께 싸우기로 하고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줄행랑을 놓은 초등학교 친구처럼 배신을 하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항복 선언을 전해 듣고 여의도 농성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등학교 시절의 배신의 추억을 떠올렸던 것이 엊그제 같다.
▲ ⓒ뉴시스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배신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MBC를 비롯한 주요방송들이 이명박 정부의 언론 관련법에 저항해 필사적인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어이없는 합의를 해줌으로써 또 한 차례 민주화운동을 배신했다. '100일 뒤 표결처리'란, 이종걸 민주당 의원의 말대로 "거의 0대 100으로 준 것"이며 MBC 신경민 앵커의 지적처럼 "민주주의 후퇴를 100일 유예한 것에 불과하다".
오죽했으면 한나라당의 홍준표 원내대표가 "국가정보원법 개정, 복면방지법, 떼법 방지법 등 여야 갈등에 첨예하게 갈등하는 모든 법안들이 각 상임위에 상정이 됐다. 나도 국회의원 네 번을 거쳤지만 국회에서 모든 갈등법안이 모두 상정되는 사례를 본 일이 없다"며 "약속을 지켜준 민주당 지도부나 상임위위원장, 간사님들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실상 백기항복을 한 민주당 지도부에 감사를 표했겠는가? 국회의원 네 번, 즉 16년만의 쾌거라니, 민주당 지도부 만만세다!
게다가 차기대권의 선두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한 마디를 하자마자 혼비백산하여 합의를 해줌으로써 '박 의원 주가 올리기'에 일등공신이 되고 말았으니 아예 차기 대권은 포기하고 박 의원 진영에 줄서기로 작정을 한 것인가?
정세균 대표는 이번 합의에 대해 "83석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며 "한나라당의 돌격과 국회의장의 터무니없는 일방적인 국회운영에 맞서서 원천봉쇄를 할 수 있는 요술방망이는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3월 1일자 지난 번 칼럼("의원직 총사퇴만이 MB악법 막을 수 있다")에서 지적했듯이 정 대표가 민주화운동 시절의 YS나 DJ처럼 목숨을 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고 민주당 의원들이 배수진을 치고 의원직을 총사퇴하고 나섰다면 의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MB악법에 확실하게 못을 박아둘 수 있었을 것이다.
요술방망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요술방망이는 분명히 있었다. 다만 기득권 때문에 쓸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결국 금배지 상실을 두려워한 민주당의 비겁한 배신으로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MBC 등은 또 다시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어렵게 발동을 걸어 링 위에 올라가 한판 붙으려고 하고 있는데 경기 연기를 선언해 김을 뺀 것이다. 그 결과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은 여야가 합의한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것이 "법안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거의 없다"며 "정부여당의 들러리를 서는 것보다는 국민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법안의 문제점들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기 때문에 논의기구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은 이번 합의에서 사실상 백기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등 자충수를 두어 다수 경제 관련법들의 2월 임기회기 통과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해 이번 합의의 책임을 덮고 넘어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뼈아픈 배신의 추억은, 보수야당의 배신의 역사는 두고두고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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