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54218.html

 

[강준만칼럼]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 
강준만칼럼 
  
지난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김은경 감독의 독립영화 <뉴스페이퍼맨: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을 보고 착잡했다. 그러다가 곧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김 감독의 탁월한 연출 능력 때문일까. 내게 이 영화는 신문 보급에 관한 영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모든 모순을 꿰뚫는 화살처럼 여겨졌다.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은 23년간 신문보급에 종사한 어느 신문지국장이 1억5000만원의 빚더미에 올라앉고, 개인파산 신청을 내기 위한 변호사 선임비용 180만원을 구하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화를 다룬 영화다. 그 신문지국장은 죽음으로 무엇에 항거하고자 했던 것인가?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이 알려주는 진실에 따르면, 일부 유력 신문과 보급소가 맺는 계약은 ‘노예계약’이다. 이 신문들이 평소 비분강개조로 보도·논평하는 사회 일각의 그 어떤 ‘노예계약’ 못지않게 악성이다. 왜 이 신문들의 정의로운 기자들은 자기 발밑은 보지 못하는 걸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건 관료주의 분업체제로 인한 ‘악(惡)의 평범성’이다. 기자들은 취재에 몰두하느라 신문지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자만 그럴까?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그 어떤 악이 저질러진다 해도 모른척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걸 가능케 해주는 마법이 바로 관료주의 분업체제다.

 

최근 유력신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보도에서 노 전 대통령과 그 일행이 저지른 ‘위선과 기만’에 대해 추상과 같은 비판을 퍼부었다. 옳은 일이며, 잘하는 일이라 믿는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이 신문들은 ‘위선과 기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보급소엔 ‘노예계약’을 강요하면서, 오직 지면에서만 외쳐대는 ‘사회정의’가 무슨 소용인가. 노 전 대통령의 그런 행각에 대한 뜨거운 분노의 화살이 똑같이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는가?

 

나는 유력신문 기자들이 꼭 이 영화를 보길 권한다. 그들의 이성과 양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한마디만 해줘도 그런 불의는 순식간에 바로잡힐 수 있다. 악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우리 발밑에 있다.

 

한국언론재단의 조사 결과, 신문 구독률은 1996년 69.3%, 98년 64.5%, 2000년 58.9%, 2002년 53.0%, 2004년 48.3%, 2006년 40.0%, 2008년 34.6%로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신문의 신뢰도도 90년 55.4%, 92년 46.2%, 98년 40.8%, 2000년 24.3%, 2006년 18.5%, 2008년 15.0%로 하락했다.

 

신문들의 절박한 위기감을 이해한다. 그러나 신문지국에 노예계약을 강요하고 살벌한 경품전쟁을 벌이는 걸로 신문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스스로 신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자해가 아닐까? 신문 전체의 공멸을 불러오는 출혈경쟁을 중단하고 신문협회 차원에서 품위있게 ‘신문 구독 캠페인’을 벌일 수는 없는 걸까? 우리 사회의 모든 공적기관들이 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신문이 가장 신뢰받는 기관으로 우뚝 서는 게 신문을 살리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신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력신문들이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을 신문사 내에서 상영하는 용단을 내려주길 소망한다. 신문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제도로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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