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도록 공감가는 글이다. 특히 공감되는 부분은 내 맘대로 파랗게 강조해봤다.

...

이로써 또다시 증명이 되는 것이, 역시 내 사상의 지점은 딱 강준만 정도의 위치이다.

그럼 나도 중도 우파? 대충 전투적 자유주의자?


진중권의 논리를 따라가면서는 늘 이게 과연...? 내가 대체...? 라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토록 속시원히 내 생각을 정리해주는 글은 참 오랜만에 봤다. 거의 5~6년 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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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inmul.co.kr/xroz/sub_read.html?uid=2147

 

직접행동은 진보적, 대의민주주의는 보수적인가?: 최장집 비판의 편협성을 개탄한다
 
강준만 
 

촛불집회에 대한 세 가지 시각
 
촛불집회에 대한 시각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부정 일변도의 시각이다. 한나라당은 촛불집회에 대해 "대선 실패로 숨죽이고 있던 반미, 반정부 세력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국민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먹거리 문제와 연계시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좌파 정권의 선동 전문가들이 드디어 쇠고기 수입 문제를 주제로 잡아 선동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이문열은 한나라당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소설 『초한지』의 완간을 계기로 2008년 6월 17일 오전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합법적으로, 그것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정부의 시행하지도 않은 정책들을 전부 꺼내 가지고 반대하겠다며 촛불시위로 연결하는데 이건 집단난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의병이라는 것이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뿐 아니라 내란에 처했을 때도 일어나는 법인데 아직 사회가 자기방어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걸 보고 참 걱정스럽다"고 주장했다.1)  
이런 주장들에 대해선 굳이 반론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각자 알아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문열에 대해선 이문열보다는 한국 언론의 천박성을 지적해둘 필요는 있겠다. 이름에 환장하는 천박성 말이다. 이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작동하는 한국 언론의 고질병이다. '선정적 뉴스가치'라는 점에서 꼭 극단을 치닫는 사람에게 환호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작태가 딱하다. 물론 이런 풍토가 이문열에겐 세상 살맛 나게 하는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볼 논쟁은 진보진영 내부의 두 가지 시각이다. 하나는 일방적 찬양론과 다른 하나는 촛불집회를 긍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이다. 이 두 번째 시각의 대표 주자는 최장집이다. 최장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섬세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일에는 '거리의 정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정치권이 나서서 전체 공익에 부응하는 제도 조건에서 선택할 대안,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낼 단계가 됐습니다. …… 아까 지나가다 보니 통합민주당 등 야당은 군중의 한 부분으로 앉아 있더군요. 정말 참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당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다양한 시민들의 소리를 적극 반영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온 것 아닌가요."2) 
최장집은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며 "운동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고 했다. 즉,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운동이 집중하느라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하면 반대편에서 파시즘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수진도 "촛불집회를 통해 발산되는 시민적 역동성은 한국 민주주의의 귀중한 자산이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만들어주지만, 참여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는 없다"며 최장집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3) 
 
박상훈-하승우 논쟁
 
같은 관점에서 박상훈도 "실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며 "촛불집회에서 얘기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등은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정치관' '복고주의'에 기초한다"고 봤다. 그는 "시민의 위대성을 수백만 번 말해도 현실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대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지금같이 하층 배제적이고 상층 편향적인 민주주의는 개선되기 어렵다"며 "촛불집회에 나타난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정당체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확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하승우는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늘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직접은 은유적 표현이다. 결정이 내려질 때 누군가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관심 있으면 나도 가서 말해야겠다는 것이지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그런 결정들에 대해 내가 복종하지 않을 수 있고 권력의 문제가 드러나면 언제라도 바꿀 수 있으며, 설령 문제가 없다 해도 그 권력이 순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부에서 우리가 권력을 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부에 권력을 주는 것"이라며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부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상훈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 채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권위주의에서 정권퇴진 운동이 갖는 정당성과는 달리, 민주주의체제에서 민주적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대통령을 운동을 통해 물러나게 할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은 매우 클 수 있다"며 "운동은 자발적 항의의 표출이고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활력 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정치체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국민적 위임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또 그는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린다"며 "반정치적 열정과 도덕적 호소로 운동의 지속만 강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론과 생활정치를 개념적으로 불러들인다 해도" 그 열기가 정당체제로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이미 그 판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 독점체제는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에 하승우는 "서구 민주주의 이론을 우리 사회에 단순 대입할 필요가 없다"며 "촛불집회라는 특이한 현상을 경험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당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당정치가 민주주의의 목표라고 보지는 않는다"며 "한국 정치에서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면, 그건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정치 자체에 대해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그는 "국민투표나 등원정치는 그 전제가 적절한 타협에 있는 만큼 촛불집회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행위"라며 "진보진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번 집회에서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4) 
 
최장집-박상훈의 '낡은 보수주의'?
 
과연 '진보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왜 논쟁을 잘 진행하다가도 꼭 상대편에 대해 진보적이지 않다거나 보수적이라거나 하는 딱지를 붙여야 하는 걸까? 직접민주주의나 직접행동을 강조하면 진보적이고, 대의민주주의를 강조하면 보수적인 것인가? 놀랍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대의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쪽엔 서양 이론에 함몰돼 있다는 딱지까지 보너스로 붙여대니, 이러고서야 무슨 소통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이명원은 "이른바 최장집-박상훈 그룹의 제도민주주의 학파가 한국 정치의 위기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양당체제의 복원이라는 대의제의 신화화에 구속되어 있다. 이들의 민주주의론은 내 판단에 이제는 '낡은 보수주의'다"라며 "그들은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5) 
최장집-박상훈은 그 어떤 촛불집회 예찬론자보다 더 비정규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실상 촛불집회의 상대적 '보수성'을 완곡하게 지적해온 셈인데, 비정규직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낡은 보수주의'라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정반대의 비판을 하는 게 타당한 게 아닐까?
박상훈은 "이번 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은 그간 사회운동의 다양한 시도와 발전에 대해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며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 촛불시위에 나올 시간도 없었다. 비정규직의 실제 참여는 많지 않았다"고 했다.6) 왜 계급을 따지는 과도한 '진보성'을 보이느냐고 비판하는 게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명원은 '보수주의'라는 딱지를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썼을 텐데, 그렇다면 비폭력 시위보다는 폭력 시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명원의 입장을 '낡은 보수주의'라고 비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개혁·진보진영 내부에서 논쟁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보수주의'라는 딱지가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건 논쟁의 알맹이와는 전혀 무관한, 단지 도덕적 우월감을 선점하기 위한 정략적 수사라는 걸 모를 사람이 있을까? '보수주의'라는 딱지가 그런 의도 없이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소통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논쟁'의 불모성
 
제3의 주장도 제기되었다. 정상호는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논쟁은) 정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지식인적 사고 같다"며 "정당정치와 운동정치 사이의 소통과 연계가 강화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한다는 것이 보편적 패턴이다. 서유럽의 경우는 사회경제적 의제가 정당을 통해 관철되고, 생활정치나 지역정치를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기제들이 일상에서 작동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장집 쪽이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너무 협소화시키고 운동을 정치의 부수 기제로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 반대편도 운동과 정당이 연계되지 않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정치적 부작용에 대한 최장집의 고민을 너무 쉽게 비난한다는 것이다.7) 
공감한다.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논쟁은 '지식인적 사고'인 정도가 아니라 '지식인적 고질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논쟁이다. 물론 그런 논쟁을 통해 배우는 게 있을 것인 바, 논쟁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논쟁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실에 비추어 뜬구름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우며, 도를 넘어선 비판까지 가세하고 있어서 개탄을 하게 만든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왜 정상호는 최장집 쪽이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너무 협소화시키고 운동을 정치의 부수 기제로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는 걸까? 우리의 현실을 근거로 판단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와 관련, 더욱 궁금한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서양 이론에 함몰돼 있다는 주장의 근거다. 최장집만큼 '정치학의 한국화'에 기여한 학자도 드문데, 그런 평가가 나온다는 게 재미있다.
오히려 정반대가 아닐까? 직접행동은 대의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만큼 한 나라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제시된 것인 반면, 한국은 아직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조차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과연 어느 쪽이 서구 편향적인 것인가? 아니면 다시 1960년 4·19나 1987년 6월항쟁으로 '복고'하자는 걸까?
 
최장집과 이문열의 만남이라고?
 
경희사이버대 교수 민경배의 촛불집회 관련 글을 읽다가 또 한 번 놀랐다. 민경배는 촛불집회에 대해 "위대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다. 그러나 본질은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다"라고 한 이문열의 발언을 소개한 뒤에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논객 이문열 씨의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과 진보 학자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 수렴론'이 촛불시위를 통해 만났다"고 했다. 답답하다. 그걸 어떻게 '만났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 이런 식의 용법을 쓰자면, 대중의 한계와 취약성을 지적하는 사람은 그 누구건 히틀러와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건가?
이어 민경배는 "촛불시위를 보며 인터넷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에 환호했던 젊은 학자는 곧바로 최장집 교수 발언에 대한 반론을 쏟아냈다"며 이명원의 '격한 표현' 몇 가지를 소개했다. "정당정치 수렴론은 낡은 보수주의이다."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이다."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협소화했다."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민경배의 평가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 수렴론'을 옹호하는 주장과 '인터넷 직접민주주의론'에 주목하는 주장 사이에도 공통점이 발견된다. 양자를 제로섬 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직접민주주의의 확대는 곧 정당을 통한 대의민주주의의 위축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터넷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는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 관계이다. …… 인터넷을 잘만 활용하면 대의민주주의에 위기가 아니라 지금의 낙후한 상황을 타개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아날로그 정치는 깨달아야 한다."8) 
"인터넷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는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 관계"라는 민경배의 주장에 100% 동의한다. 그런데 왜 민경배는 최장집의 주장이 그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단정한 걸까? '정당정치 수렴론'이라는 말에 함정이 있는 것 같다. 민경배는 최장집과 이명원 사이에서 중간에 선 것처럼 자세를 취했지만, 실은 이명원의 딱지를 그대로 가져다 씀으로써 중간에 서는 데에 실패했다. 
'정당정치 수렴론'은 넓게 보고 선의로 해석하자면 최장집 스스로 그 말을 쓴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말의 사용 맥락이다. 최장집은 이명원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당정치 수렴'을 주장한 게 아니다. 딱지를 정확하게 붙이려면 '폐허화된 정당정치 직시론'이다. 촛불집회는 기존 정당정치를 쓰레기 취급한 집회였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주요 인사들마저 개인 자격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을 뿐 정당 차원에선 배격 대상이었다.
물론 그건 정당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만, 정치학자의 입장에선 촛불집회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 정치 전반에 대해 말할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은가. 최장집은 폐허의 재건을 이야기한 셈인데, 그걸 '정치의 협소화'로 보는 게 온당한가? 
 
'진보신당에 맞아죽을 각오로 말씀드리면'?
 
『경향신문』을 읽다가 '최장집 교수 주장은 위험'이라는 소제목이 보이기에 봤더니,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별 설명이 없다. 정태인이 최장집의 정당정치론과 관련,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위험하다"며 "촛불로 드러난 온라인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가능성을 넷-정당의 형태로 정당정치에 접목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게 전부다.9) 
그것 참 이상하다. 정태인은 대안 제시에서 내내 사실상 최장집의 주장을 반복해 말하고 있는 셈인데, 왜 자기 주장을 스스로 위험하다고 말한 걸까? 정태인은 진보정당의 과제로 풀뿌리정치를 강조하며 "중앙당의 상근자들이 지방에 내려가 지구당을 하나씩 꿰차고 해야 풀뿌리정치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진보정당도 권력의지, 집권의지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10) 또 그는 "다음 아고라에 가면 여당이 진보신당이다. 넷정치를 활성화시켜서 확대하면 인터넷의 정부가 생길 수도 있다"며 "진보신당에 맞아죽을 각오로 말씀드리면 변혁의지 버리고 집권의지 가져라"고 했다.11) 
그렇다. 바로 그거다. 서울에서 한판 운동으로 크게 해볼 생각만 하지 말고 각자 '고향 앞으로' 해서 그곳에서 풀뿌리정치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 주장이 최장집의 정당정치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최장집이 말하면 위험하고, 정태인이 말하면 비전인가? 정작 문제는 겨우 그 정도의 당연한 발언을 하면서도 "진보신당에 맞아죽을 각오로 말씀드리면"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풍토에 있는 것 같다. 그간 진보신당을 위해 헌신해온 정태인조차 그런 '자기검열' 압박을 느끼고 있는 바, 바로 이런 풍토가 최장집에 대한 오해와 그에 따른 무례의 근원일 것이다.
 
소통을 위한 겸손에 충실하자
 
이미 1931년에 안재홍은 조선의 운동은 걸핏하면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열중 집착하는 동안, 왕왕 일정한 과정적 기획정책을 소홀히 한다고 개탄한 바 있다.12) 그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각자 나름대로 과정적 기획정책을 열심히 제시하면 되는 것이지,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열중 집착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이게 '보수적' '서양 편향적' 운운하는 비방성 딱지를 붙여가면서까지 논쟁을 할 사안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양쪽의 주장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좌절과 환멸의 부메랑을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촛불집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지나친 호들갑이 아니었을까? 물론 선동의 목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동을 할 사람은 선동을 하더라도 차분하게 냉정한 분석을 하는 사람도 필요한 게 아닐까? 선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 욕까지 먹어야 한다는 건 지나친 게 아닐까?
촛불집회의 주요 목적이 무엇이었나? 소통하자는 게 아니었나? 2008년 6월 7일 『한겨레』 1면에는 다음 카페 소울드레서의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추렴해서 낸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는 "국민은 소통을 하려고 하는데 불통이 되니까 울화통이 터집니다"라면서 이제 쇼는 그만하고 국민과 소통해 달라는 호소로 끝을 맺었다.13) 그런데 진보진영 내부에서조차 싸워야 될 이유가 전혀 없는 사안과 주장에 대해서까지 까칠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소통 불능성, 이게 문제의 근원은 아닐까?
'인터넷 직접민주주의'를 말하기 전에 소통의 기본 예의부터 지키자. 모두가 다 지식인인 세상이긴 하지만, 특별히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남문희의 다음과 같은 개탄에 책임감을 느껴보자.
"블로그를 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 내부 갈등의 골이 매우 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글을 읽은 이들이 댓글을 무기 삼아 난타전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때로는 글 내용과도 무관하게 설전이 오고 간다. 자신과 관점이 다른 글에 대해, 능히 댓글로 비평을 가할 수 있고, 또 겸허히 수용하면 문제될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그 지적이 늘 과하다는 데 있다. 사실에 입각한 논리적 비평보다는 먼저 상대를 규정부터 하려고 든다. 그러니 공론의 장보다는 서로를 타도하기 위한 전장으로 돌변하고 만다."14) 
상대를 규정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타성에 젖은 습관적 용법은 자제하자. 다 진보를 추구한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니 주장은 보수야!"라고 규정해버리면 더 이상 대화가 안 된다. 그건 내 편을 늘려보겠다는 얄팍한 선동이 되고 만다. '진보'가 무슨 벼슬인가? 진보의 생명은 겸손이다. 이 또한 낡은 보수주의인가?
 
강준만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 
  
  
--------------|  주  |-------------- 
1) 유성운, 「이문열 "촛불장난 너무 오래하는 것 같다"」, 『동아일보』, 2008년 6월 18일.
2) 손제민, 「최장집 교수 "100일 정권이 퇴진하는 사태 올 수도"」, 『경향신문』, 2008년 6월 11일.
3) 이순혁, 「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한겨레21』, 제719호(2008년 7월 22일), 32∼33면. 
4) 손제민 이지선 임지선, 「"시위 지나치게 신화화" "참여의 즐거움 보여줘": 박상훈-하승우 박사의 '촛불집회' 논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5) 이순혁, 「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한겨레21』, 제719호(2008년 7월 22일), 33면. 
6) 손제민 이지선 임지선, 「"시위 지나치게 신화화" "참여의 즐거움 보여줘": 박상훈-하승우 박사의 '촛불집회' 논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7) 이순혁, 「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한겨레21』, 제719호(2008년 7월 22일), 33면. 
8) 민경배, 「디지털 참여와 대의정치가 만날 때」, 『시사IN』, 제45호(2008년 7월 26일), 65면.
9) 김종목 이지선 임지선, 「"시장만능 정치가 각자의 삶 위협한다는 자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10) 김종목 이지선 임지선, 「"시장만능 정치가 각자의 삶 위협한다는 자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11) 손제민 이지선 임지선, 「"시위 지나치게 신화화" "참여의 즐거움 보여줘": 박상훈-하승우 박사의 '촛불집회' 논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12)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136쪽.
13) 권태선, 「소통? 불통! 울화'통'」, 『한겨레』, 2008년 6월 13일.
14) 남문희, 「우리는 왜 한쪽 날개로만 날까」, 『시사IN』, 제44호(2008년 7월 19일), 64면.
 
2008/08/20 [16:39] ⓒ인물과사상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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