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으면서 "진중권"을 떠올리는 건, 나 뿐일까?

"상대편을 공격함에 있어서 가능한 한 깊은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의 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극단주의", 이거 강준만이 진중권에게 늘 느끼고 있는 "위험성"이었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강준만 교수는 왜 이 글을 썼을까? 최근 시대상황하고는 별 관계없어 보이는 글을, 뜬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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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www.sun4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39

 

‘생산적 싸가지’와 ‘파괴적 싸가지’  
[강준만 칼럼] 
 
 2008년 10월 12일 (일) 20:20:02 강준만  kjm@chonbuk.ac.kr  

 
‘싸가지’라는 말은 썩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는 대체할 수 없는 묘한 울림이 있어 ‘싸가지론’을 펴 보고자 한다. 최근 어떤 자리에서 싸가지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싸가지라는 개념에 대한 혼란이 만만치 않다는 걸 절감했다. 교통정리를 해보자. 싸가지를 ‘생산적 싸가지’와 ‘파괴적 싸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국어사전을 보면, 싸가지는 싹수 또는 싹수머리다. 싹수란 ‘싹’에서 나온 말로 “앞으로 잘 트일 만한 낌새나 징조”를 말한다. 싸가지가 없다는 건 그런 낌새나 징조가 없어 돼 먹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우리는 보통 인사성이 없거나 무례하거나 건방지거나 당돌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켜 “싸가지가 없다”고 말한다.

 

형식은 그렇지만 그 내용이 옳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잘못되었거나 낙후된 관행을 고수하면서 그걸 바꿀 뜻이 전혀 없는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싸가지 있게 행동한다는 걸 무엇을 뜻하는가? 그 문화에 편입된다는 걸 의미한다. 싸가지가 없어야만 기존 문화에 도전해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걸 ‘생산적 싸가지’로 부르기로 하자. 엄밀히 말하자면 ‘생산적으로 싸가지 없음’이지만, 그렇게 줄여 부르기로 하자. 마찬가지로 ‘파괴적으로 싸가지 없음’도 ‘파괴적 싸가지’로 줄여 부르기로 하자.

 

 ‘파괴적 싸가지’란 무엇인가? 이는 ‘생산적 싸가지’와 다른 종류의 것은 아니다. ‘생산적 싸가지’ 중에서 어떤 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은 물론 모두를 파괴로 몰아가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바로 이 ‘지나친 정도’를 판별하는 데에서 혼란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싸가지 논쟁을 벌일 때엔 생산적이냐 파괴적이냐를 놓고 따져보는 게 논쟁의 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파괴적 싸가지’엔 여러 특성이 있을 수 있겠지만, 딱 두가지만 지적하기로 하자.

 

첫째, 지구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자기 중심주의다. 물론 이건 어느 단계까진 매우 좋은 점이다. 궂은 일에도 자신이 앞장서고 헌신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리더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주장을 절대선이자 절대 진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모든 걸 자신이 주도하지 않으면 못 견뎌 한다. 자신의 주도권을 위해 끊임없이 분열과 분란을 일으키면서 상대편을 악(惡)으로 몰아간다.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전체 집단이 망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악과 거짓이 힘을 쓰게 하느니 차라리 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과장된 묘사를 하긴 했지만 이런 사람은 어느 조직에건 꼭 있기 마련이다.

 

둘째, 상대편을 공격함에 있어서 가능한 한 깊은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의 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극단주의다. 추종자들은 카타르시스 효과를 만끽하면서 열광하기 마련이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너무도 속이 후련하게 공격해주니 교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다.

 

‘파괴적 싸가지’의 주인공은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초월해 존재한다. 이들에겐 능력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전체 집단이지만, 특별히 더 피해를 보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생산적 싸가지’의 주인공들이다. 두 유형의 싸가지를 판별하는 것이 어려워 사람들이 무조건 싸가지 없는 사람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싸가지를 따지는 건 보수적 인간관의 표출이었지만, ‘싸가지 없음의 대중화’가 실현되고 있는 인터넷 시대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성찰성이다. 싸가지가 있건 없건 성찰 능력부터 보는 게 올바른 판단법이리라.

 

/ 전북대 신방과 교수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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