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스트레스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강교수는 늘 비판의 칼날을 진보진영쪽을 향해서만 내두른다. 그나마 관심을 가져주고 말이 먹히기 때문일까?
화합하려면 상대방도 화합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화합이 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까지 포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라는 홍세화씨의 말이 이 시점에서 떠오르게 된다.

마지막 말 "언로(言路)와 그걸.... 허영심..."은 말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가 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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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www.sun4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11

 

‘카타르시스’와 ‘스트레스’ 사이에서  
[강준만 칼럼] 
 
 2008년 11월 23일 (일) 22:29:10 강준만  kjm@chonbuk.ac.kr  
 
 
신문 칼럼 쓰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교수들이 많다. 아카데미즘과 비교해 저널리즘이 천박하다는 이유로 그러는 교수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겸손’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나는 칼럼 쓰기를 즐겨 하긴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가끔은 정말 쓰기 싫을 때가 있다. 자꾸 위선을 저지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늘 사회를 향해 설교하고 주문하는 게 스스로 역겨울 때도 있다. 그런 설교와 주문이 영향력을 제법 발휘한다면 그 재미로나 해보련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내가 왜 이래야 하나?”하고 자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른바 ‘악플’이 고맙게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칼럼을 쓰는 건 사회적 역할 분담론에 따라 내 몫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업은 사회적 관계망에 따른 ‘자기검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이다. 시간적·정신적 여유도 있고 자신의 전공에 따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니 그 직업의 이점을 발휘할 의무가 있지 않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교수들이 잘 났거나 똑똑하거나 정의롭거나 양심적이라서 사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아니다. 물론 전문가적 식견을 드러내는 칼럼을 쓰는 교수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칼럼은 바로 그런 직업적 특성의 산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겸손이 강한 교수들은 그런 역할 분담론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위선을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존중하거니와 존경한다. 그런데 칼럼을 포함하여 대중적 글쓰기를 많이 하는 교수들에게도 개인별 ‘겸손 격차’는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인터뷰할 때 기자들이 제게 묻는 주제의 목록을 열거하면 깜짝 놀랄 겁니다. 그 목록은 핵 전쟁의 위협과 스커트의 길에서부터 동유럽의 변화, 훌리거니즘(폭력), 인종차별주의, 에이즈 등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학자들에게 사회적 존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일관되고 조직적인 답을 줄 수 있는 선지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울리지도 않고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건 그런 역할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르디외는 기자 탓을 했지만, 한 손만으로 손뼉을 칠 수 있겠는가. 누가 먼저 시작했건 그런 선지자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이 많으니까 기자들도 그러는 게 아닐까. 실제로 우리 사회에도 어떤 사회적 현상에 대해 그냥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좋을텐데, 악착같이 나름의 답을 내놓으려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다. 과잉 서비스라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과잉 서비스를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정작 문제는 ‘대안 없는 비판’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비판은 대안 제시를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이게 대중지식계의 주류 풍토가 되는 건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판도 ‘상품’의 성격을 갖는 건 불가피한 일이지만, ‘상품성’을 앞세우는 본말의 전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안은 스트레스를 요구한다. 어떤 대안에 대한 반대세력의 입장도 고려해가면서 타협책까지 같이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성 지지자를 갖기도 어렵거니와 그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런 지식 담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잘 팔리는 대부분의 ‘지식상품’은 수용자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카타르시스’ 기능 일변도다. 카타르시스도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사회적 난제의 해결을 위해선 카타르시스보다는 스트레스가 더 필요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의 이념적 당파성에만 충실한 대안은 대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안은 실천을 전제로 해야하기 때문에 ‘소통’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논객들은 이념 전사(戰士)로서의 투지와 기상만 돋보일 뿐, ‘화합’의 방안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옳음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상대편은 이미 ‘악인’이거나 ‘바보’로 규정돼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달라져야만 한다는 게 유일한 화합 방안이라면 방안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건 이들 역시 ‘겸손’하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속된 말로 “3·8선 나 혼자 막나?”라는 생각은 가급적 주제넘음을 피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논객들은 주로 ‘정당 지도자’ 형이지 ‘대통령’ 형이거나 ‘자치단체장’ 형은 아니다. 하기야 대통령부터 당파주의의 깊은 계곡으로 빠져드는 걸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내지르기’가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도저히 화합으로 수렴을 할 수 없는 상황 말이다.그러나 이제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친 이 시점에서도 수렴 대신 ‘내지르기’로만 내달려야 할까? 귀찮고 고통스럽더라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도하면서 전체 판의 상황 분석과 판단을 다시 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나라가 잘 되려면 화합으로 가야할텐데,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한국과 미국은 처지가 크게 다르지만, 오바마의 ‘화합 상품화’에서 건질 건 없는가? 일개 교수의 입장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주제넘은 정도를 넘어 허영심이라고 해야 할까? 언로(言路)와 그걸 채우는 담론의 성격과 지향성도 따져보는 게 나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이 대책 없는 허영심에 대해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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