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50635.html

 

[강준만칼럼] 약자의 원한 
강준만칼럼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아마도 약자들의 복수와 원한에 내재하는 합리성 혹은 정당성을 창조적으로 인정한 덕택에 발전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이해해보자. 그것은 약자들의 원한과 분노가 창조적으로 인정되면서 새로 태어난 권리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묘하다. 니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의 깊은 구석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니 말이다. 김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논하다가 “니체의 철학을 논의하는 책이니만큼, 이 정도에서 만족하자”고 했을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아니 철학이 뭐길래, 그렇게 점잔을 빼야 한단 말인가?

 

니체는 ‘약자의 원한’을 혐오했으면서도 그것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무수한 얼굴을 가질 것임을 예감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건 그 얼굴의 정체성을 놓고 사회적 갈등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 갈등은 자주 ‘약자의 원한’을 혐오하는 쪽으로 결말을 맺는 것 같다. 그것이 창조적 결실을 맺은 뒤엔 어김없이 타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자신의 약점은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서 생기는 차별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강점에서 오는 이로움이나 명예는 그대로 누리면서 차별을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런 이중적 태도는 ‘강약’(强弱)이 상대적이며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의 도시 거주자가 ‘서울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선 농촌에 대한 ‘도시 패권주의’에 눈을 감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약자의 원한’이 자주 드러내는 한계이자 모순이다.

 

‘약자의 원한’을 타락시키는 매개는 늘 돈이다. “돈은 원초적으로 무의식의 대상”이라고 한 제임스 힐먼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모든 정치경제 시스템을 바꿔 놓았지만 단 하나 바꾸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돈 시스템이다. 돈은 혁명 위에 존재한다. 수많은 혁명가들과 개혁가들이 종국엔 돈으로 망가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의식의 세계에선, 그들의 패가망신은 ‘권력·금력·명예 3분법의 파괴’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 인간의 삶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지만, 사회적 인정의 기준과 투쟁 방식이 너무 획일화돼 있다. 가장 이상적인 건 권력·금력·명예의 3분법이 지켜지는 것인데, 세 가지를 모두 갖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게 당연시되는 풍조마저 만연해 있다. 그런 풍조를 타고 공직의 기회비용에 대한 과대평가가 발생한다. 자신의 역량이라면 공직에 있지 않고 개인적인 돈벌이로 나섰을 때에 어느 정도를 벌었을 것이라는 계산을 자기 위주로 하고, 권력을 이용해 그 돈을 취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죄책감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단죄의 형평성에만 집착한다. 강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약자의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원한’이 가져온 사회적 축복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꼭 필요하리라. 김 교수는 니체를 가리켜 “인간 사회가 문화적으로 고양되기 위해 필요했던 폭력에 대해 너무 생생하게 증언하느라 미쳐버린 증인”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의 성찰을 압박하는 위악적 달인이라고나 할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오랜만에 두뇌훈련도 할 겸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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