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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관용의 적(敵)인가?
2009.08.18
강준만
"Tolerance('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te'에서 온 말):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인 방식이나 관점과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 있게 참아주는 것."(23∼24쪽)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의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em van Loon, 1882∼1944)은 『관용』(이혜정 옮김, 서해문집, 2005)에서 위 정의에 근거해 서양 관용의 역사를 재미있게 탐색하고 있다. 그는 "관용을 향한 투쟁은 개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뒤에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근대의 모든 재발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 개념을 탄생시킨 공로는 그리스인들에게 있다"고 말한다.(31쪽)
기원후 관용의 최대 시험대는 로마였다.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며,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예수에게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예수 자신도 유대인이었고, 그는 평생 조상 고래의 율법을 지키는 데 무척 철저했으며, 대부분 유대인들 앞에서만 설교했다는 사실. …… 그가 했다는 말 가운데 로마의 보통사람이 들어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가 실제로 하려고 했던 것은 이것이다. 그는 그들 민족의 교회에 생겨난 무서운 폐해를 똑똑히 보았다. 그는 그에 대해 소리 높여 항의했고 때론 항의가 먹혀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개혁을 위한 싸움을 내부에서 벌였다. 자신이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듯 보인다. 누가 그에게 그럴 가능성을 비추었더라면, 그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과 이후의 많은 개혁가들처럼, 그는 점차 타협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는 때 이른 죽음 덕분에, '내부'에서 좀 유익한 일을 하고자 했을 뿐이건만 어느 순간 보니 자기가 원래 속했던 조직 '외부'의 전혀 새로운 파벌의 선봉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해 마지않았던, 루터를 비롯한 숱한 개혁 주창자들과 같은 운명을 맞지 않았을 뿐이다."(88∼89쪽)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유대교 회당에서 모였다. 그러다가 이방인 신도가 생기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자 이방인들은 신자 집에서 모였다. 처음에는 안식일이 모임 날이었지만,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에 악감정이 격화되면서 이방계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관습을 버리고 예수 부활이 일어난 날인 일요일에 만났다고 한다.(91쪽)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한 '밀라노 칙령'을 통과시켰다. 중고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밑줄 그어가며 외웠던 역사적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콘스탄티누스의 정략을 지적한다. 그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내와 처남과 7살 먹은 조카를 죽인 난폭한 살인자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도 가장 위험한 적수 막센티우스와 싸우러 나가기 직전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염치도 없이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는 '제2의 모세'라는 엄청난 명예를 얻었음은 물론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에선 끝내 성인품까지 올랐다. 그가 겉으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지만 이교도로 살다가 죽었다는 것, 말년에 이르러서도 희생제사에 바쳐진 양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내장으로 미래를 점치려 했다는 것, 이런 모든 사실은 지극히 사려 깊게 눈감아졌다."(115∼116쪽)
이런 일련의 주장에 대해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건 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너무도 근본적인 문제다. 그런데 저자도 그리스도교 독자들에게 관용을 구할 뜻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역사적으로 최악의 불관용은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시종일관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세의 이단자들은 거의 백이면 백, 홍보의 재주가 조금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며, 그 대표적 사례로 마니교도를 든다.
"중세의 일등 그리스도인에게 마니교도는 아주 못마땅한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죄목을 걸어 재판에 부치기가 어렵자 그들은 풍문에 근거해 그들을 처단했다. 이 방법은 극적이지도 않고 진행도 엄청나게 더딘 정식 법정에 비해 분명히 이점이 있었지만, 때론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도 있어서 수많은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런 해결책은 불쌍한 마니교도들의 경우 더욱 억울한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 종파의 창시자인 페르시아인 마니(Mani)가 선행과 자비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149쪽)
뒤이어 나타난 '마녀 사냥'을 지휘한 교황청 소속의 이단 법정은 잔 다르크에서 갈릴레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저자는 "바위투성이 성곽의 캄캄한 굴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끔찍한 운명보다는 화형목에서 불타 죽는 게 낫기에, 많은 죄수들이 차라리 이단으로 선고받아 비참함에서 벗어나려고 짓지도 않은 온갖 죄를 고백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세계 각지에서 500년 넘게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수많은 순진한 사람들이 어떤 말 많은 이웃이 속삭거린 소문 때문에 어느 날 밤 갑자기 잠자리에서 끌려갔다는 것, 이름도 자격도 알지 못하는 판사 앞에 나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저분한 감방에서 몇 달 몇 년을 보냈다는 것, 자기가 무슨 죄로 그곳에 와 있는지 한 번도 들은 바가 없었다는 것, 그들의 죄를 일러바친 이가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는 것, 친척과 이야기를 할 수도 변호사와 상의할 수도 없었다는 것, 죄가 없다고 계속 주장하면 사지가 다 부러질 때까지 고문을 받기도 했다는 것, 다른 피고의 죄에 대해 증언하는 건 이단에게도 허용되었지만 다른 피고에게 유리한 얘기를 하려면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비참한 신세가 됐는지 감도 잡지 못한 채 죽는 일도 있었다는 것. 50년, 60년씩 묻혀 있던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고,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난 사람에게 '궐석' 재판으로 유죄를 선고하고는 그의 상속인들에게서 모든 재산을 빼앗은 일은 더더욱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게 다 사실이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몰수 자산으로 자유롭게 활동 경비를 충당했던 까닭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았고, 두 세대 전에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죄 때문에 거지로 내몰리는 손자들이 숱했다."(162∼164쪽)
그렇게 집단적으로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단을 고발하는 첩자들이 없을 리 없었다. 13∼15세기에 유럽은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악한 첩자들로 들끓었으며, 이들은 교회를 비난했다거나 어떤 교의에 의문을 표했다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일로 먹고살았다고 한다.
"주변에 이단이 없으면 만들어내는 것이 앞잡이 공작원의 일이었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이라도 고문이 죄를 자백하게 만들 터이므로, 그들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이 끝없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영적인 결함이 의심되는 사람을 익명으로 고발할 수 있는 제도로 말미암아 많은 나라에 그야말로 공포 시대가 열렸다. 드디어는 가장 가깝고 친한 친구조차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한 집안 사람들마저 서로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단 심문 법정에서 많은 일을 담당한 탁발승들은 이 방식이 불러온 공포 분위기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거의 두 세기 동안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그렇다. 종교개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들 중 하나는 많은 사람이 탁발승이라는 오만한 거지들에 대해 넌더리를 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입네 하며 선량한 시민들 집에 함부로 쳐들어갔고, 가장 포근한 침대에서 잤으며, 최고로 맛난 음식을 먹었고,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들이 이미 자기들 몫이라 여기게 된 갖가지 호사 중 어느 하나라도 못 누리게 될 경우 그간의 은인을 이단 법정에 고발하겠다는 위협만으로 편안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164∼165쪽)
그래서 종교개혁, 즉 개신교혁명은 관용을 가져왔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 개인과 신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던, 그리고 지나간 시대의 모든 편견과 모든 부패를 없애고자 했던 이 위대한 개혁은 중세의 낡은 인습을 너무나 잔뜩 지고 있었던 나머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그 결과 그것이 더없이 혐오하던 교황 체제의 완전 복사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짓'이라고 선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루터가 몇 년 후에는, 재세례파 사상에 물든 독일인과 네덜란드인들을 사악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증오에 빠져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인간은 인간의 논리 체계를 신께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삶의 행보를 시작한 용맹한 개혁가(칼뱅)가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논법보다 명백히 우수한 논리를 펴는 적대자를 화형시키고 있다. …… 마침내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왔다는 새 시대를 외쳤건만, 칼뱅과 루터는 둘 다 생애 내내 결국은 철저한 중세의 아들이었다. 그들에게 관용은 미덕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 자신이 국외자였을 때 그들은 양심의 자유라는 신성한 권리를 즐겨 외치며 적들에 대한 반론에 이용했다. 그러나 일단 싸움에 이기고 나자 이 든든한 무기는, 쓸모없다고 버려진 수많은 좋은 개념들로 이미 꽉 찬 개신교의 고물 창고 구석에 소리 없이 던져졌다."(212∼215쪽)
그러나 저자는 개신교 혁명이 관용이라는 면에서 큰 기여를 했다는 건 인정한다. 직접적인 면에서 얻은 것은 참으로 작았지만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은 모든 면에서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첫째, 그것은 사람들을 성서와 친숙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검증이 시작돼 성서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에게 성서는 더 이상 모든 참된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사색을 막는 장애가 없어지자, 거의 천년 동안 둑으로 막혀 있던 과학적인 연구의 물줄기가 원래의 물길로 흐르기 시작했다. 둘째, 종교개혁은 북유럽과 서유럽을 종교 조직이라는 허울 아래 로마제국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권력의 독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다시 세워주었다.(215∼221쪽)
관용의 최대 적은 무엇일까? 저자의 종교 비판을 상기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건 바로 신념이다. 이게 이 책의 진정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자는 "관용을 위해 싸웠던 이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신념엔 의심이 섞여 있었다는 것.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 생각이 철저한 확신으로 굳어지는 지경에는 결코 이르지 않았다. 100퍼센트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과도한 애국심의 시대인 오늘날, 획일적인 것을 체질적으로 혐오하는 자연의 교훈을 눈여겨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 세상에서 진짜 쓸모 있는 것은 모두가 합성물인데, 신념만 예외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우리 '확신'의 밑바탕에 '의심'이라는 불순물이 어느 정도 들어 있지 않는 한, 우리의 신념은 순수한 은으로 만든 종처럼 경망스러운 소리나 놋쇠로 만든 트롬본처럼 쇳소리를 낼 것이다. 관용의 영웅들이 세상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바로 이 점에 대한 깊은 인식이었다."(226∼227쪽)
저자는 관용의 진보에 기여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를 탐구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청어 무역에 종사했고 어머니가 스페인계 유대인 혈통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상인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은 이 남자의 전반적인 시각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군인과 정치가로서의 그의 이력 전체를 특징짓는, 광신과 위선에 대한 격렬한 혐오는 보르도 부둣가 한 구석에 작은 생선 가게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중세 때는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낳는다"고들 했다. 저자는 이 말에 빗대어 "사업이 관용을 낳는다"고 역설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오하이오주의 와인스버그에선 KKK단이 설칠 수 있지만 뉴욕에선 꿈도 못 꾼다. 뉴욕 사람들이 만에 하나 유대인과 가톨릭 그리고 모든 외국인을 배척하는 운동을 시작한다면 월스트리트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고, 노조가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도시 전체가 가망 없이 피폐해지고 말 것이다. 중세 후반도 마찬가지였다. …… 순수한 농업 국가라면 축제 삼아 이교도 화형식을 잇달아 벌이며 농부들을 즐겁게 해주어도 별 문제 없었다. 그렇지만 베네치아나 제노바 또는 브뤼헤의 시민들이 성벽 안에서 이교도 학살을 자행했더라면 그 즉시 외국 회사 대리인들의 대탈출이 일어났을 테고, 그에 이은 자본 회수로 도시는 파산하고 말았을 것이다."(300∼303쪽)
미국은 어떤가? 저자는 종교의 자유나 관용이라는 대의를 놓고 볼 때에 미국은 그다지 한 게 없다고 평가한다.(355쪽) 하긴 미국 독립운동의 가장 뛰어난 선전가였던 토머스 페인이 무신론자로 찍혀 비참하게 죽은 데다 죽고 나서 1세기가 지나도록 '비열하고 더러운 무신론자'라는 평판이 사라지지 않았던 걸 보면 그런 평가가 무리는 아니다. 저자는 페인을 다룬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공적(公的)인 불관용의 광기가 다하면 그 즉시 사적(私的)인 불관용이 시작되고, 관(官)이 처형을 그치면 린치가 시작된다."(439쪽)
일부 독자들의 관용이 필요한 주장이 있었겠지만, 이 책이 쓰인 시점이 1925년이라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미국 사회 전반에 희대의 불관용이 휩쓸던 시대다. 그가 모든 불관용의 밑바닥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시의 시대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앞서 "사업이 관용을 낳는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현 시대의 불관용은 많은 경우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논리에서 비롯되지만, 과거엔 사업 논리가 진보적인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계급이나 연고로 뭉친 악성 패거리 논리보다는 자본 논리가 훨씬 더 진보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저자는 관용이 관례가 되는 날은 올 거라면서도 "1만 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만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은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446쪽) 그러나 저자의 관용의 법칙에 따르자면 신념은 금물이다. 신념은 관용의 적(敵)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모든 신념을 폐기할 수는 없는 법. '신념+여유'를 가리키는 신조어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또 어떤 신념인가가 중요할 게다. 관용을 갈구하는 저자의 신념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어찌됐건 관용이 관례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불관용의 폭풍이나 좀 누그러지면 좋겠다.
강준만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9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
관용이라는 화두 하나를 가지고 책 한 권을 인용으로 시작해서 인용으로 끝냈다.
이명박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었을까?
어째, 요즘 좀 강교수의 글빨이 너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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