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너그러움 보여주라 이명박 정권은 통일도 평화도 내팽개치며 북한과 똑같은 허세를 부림으로써 그 자신에게도 유리하지 않을 정치·군사적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사입력시간 [145호] 2010.06.25 08:35:08
고종석 (저널리스트)
초등학생 때 6월25일이 다가오면 ‘반공 글짓기’라는 것을 해야 했다. 말이 ‘반공 글짓기’지 사실은 ‘반북 글짓기’였다. 때로 ‘반공 포스터 그리기’나 ‘반공 웅변대회’라는 것을 병행하기도 했다. 글이든 말이든 그림이든 워낙 손방이었던 터라 내 글이나 포스터가 교실 뒷벽에 붙는 일도 없었고, 연단에 올라가 웅변을 해본 적도 없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연례행사에 금방 질려버렸다. ‘반공 글짓기’ 글은 태반이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 괴뢰군은 38선을 넘어…”로 시작됐고, ‘반공 포스터 그리기’는 머리에 뿔이 달린 인민군 침략자들을 국군이 막아내는 장면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글이나 그림은 정적(靜的)이어서 참고 봐줄 만했다. 반면 열 살 앞뒤의 아이들이 연단에 올라 고사리손을 휘저으며 비장한 목소리로 ‘반북’을 외치는 것은 보기 민망하다 못해 섬뜩했다.
반공 포스터에 등장하는 인민군이 머리에 뿔을 달고 있었던 것은 교사가 그렇게 그리라고 강요해서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등학교 교육과정에는 ‘바른생활’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이 과목의 핵심은 반공 교육이었다. 그 ‘바른생활’ 교과서의 삽화 속에서 인민군은 뿔을 단 괴물이나 늑대로 묘사되었다. 내 세대는 ‘바른생활’ 교과서를 읽으며, 또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로 시작하는 6·25 노래를 부르며, 북한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쌓았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거기도 사람 사는 덴데 설마 이렇기야 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바른생활’ 과목이 ‘반공도덕’이라는 과목으로 대치됐다. ‘반공도덕’의 정식 이름은 ‘승공통일의 길’이었다. 반공도덕 교과서의 표제가 ‘승공통일의 길’이었다는 뜻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반공도덕 교과서는 꽤 읽을 만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지겨울 정도로 반공을 선전하고는 있었지만, 북한 사정이나 동유럽 공산화 과정에 대해 꽤 알찬 정보를 담고 있었다. 나이 스물 전후로 세상을 알아갈 무렵, 나는 어려서 받은 반공 교육을 되돌아보며 충격을 받았다. ‘바른생활’이나 ‘반공도덕’ 교과서에 속았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또래보다 조숙하다고 은근히 자부하며 ‘반공도덕’ 교과서를 그저 선전 팸플릿으로 여겼던 나는 이 교과서에 적지 않은 진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물론 ‘반공도덕’ 교과서가 선전 팸플릿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히 그 교과서는 선전 팸플릿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팸플릿이 묘사하는 북한 사회와 동유럽 사회는 실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회는 결코 낙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들이 어떤 사회를 꿈꾸었든,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세워진 사회는 그 꿈과 아주 다른 디스토피아였다. 군사정권의 반공 캠페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판단으로, 나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저주했다. 그리고 그 뒤 내 반공주의는 흔들림이 없었다.
통일보다 평화가 먼저다
1990년을 전후로 무너져내린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가 ‘왜곡된 마르크스주의’ 체제였다면, 지금까지도 건재해 보이는 북한 공산주의 체제는 아예 ‘뒤집어놓은 마르크스주의’ 체제일지도 모른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는 공화국의 수반이라기보다 왕조의 군주에 가깝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어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권력의 부자(父子) 승계를 실천했고, 실천하고 있다. 인민이 굶주려 죽거나 나라 밖으로 도망을 가도, 평양의 권력자들은 멀쩡하다. 지금 우리가 대적하고 있는 휴전선 이북의 체제는 역사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괴물 체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전쟁을 통해 이 부도덕한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면 북한 체제는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남한 체제도 온전치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전해야 할 가치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2000년의 6·15 선언 역시, 겉보기와 달리, 통일의 문서라기보다 평화의 문서였다. 평화는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통일은 그 다음이다. 지금 정권은 통일도 평화도 내팽개치며 북한과 똑같은 허세를 부림으로써 그 자신에게도 유리하지 않을 정치·군사적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라. 그것은 자존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강자의 너그러움을 보여주라.
스스로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꼭 이렇게 "고백"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바른생활"에서 시작되어 "반공도덕"에 이르는 이야기들은 그저 군더더기이자, 거슬림이다.
극우세력에게 통일은 신자유주의로의 흡수통일일 것이고, 종북세력에게는 1+1+2+2 연방제 통일일 것이다.
통일 이전에 평화란 말은 동의.
이명박 정권은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이며 정치적으로는 "보수"다.
여기서의 "보수"는 절대 미국이나 유럽식 보수가 아닌, 한국형 보수를 일컫는다. 이런 경우 보통은 "보수"라고 쓰고 "극우"라고 읽기도 한다.
천안함에서부터 시작된 한반도 신냉전체제는 대체 누구에게 유리할까? 이익을 얻는자는 도대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