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아니 그 이전부터 대한민국 땅은 짧은 말 전성시대였다.

 

수많은 동의어 표현 중에서 거의 대부분 가장 짧은 말이 선택되어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습게도 "신문" 때문이었다.

 

이 정도만 말해도 감이 있는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하시겠지만 조금 설명을 곁들이자면,

신문에서는 "타이틀"에 쓸 수 있는 글자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짧은 단어로,

또는 긴 단어를 억지로 줄여서라도 짧은 단어로 만들어 써야 하는 상황이 많았고 그래서 수많은 말들이 본의 아니게 짧아졌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들이 중국어 표기의 나라 이름이다.

 

- 도이칠랜드(Deutschland): 독일(獨逸) --> 獨

-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美國) --> 美 또는 米

- 인도네시아(Indonesia): 인니(印尼)

 

좋다. 전통 어쩌고, 관습 어쩌고를 다 떠나서, 저 한자 표기들은 의미를 따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써왔다거나, 혹은 중국어 발음이 실제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고 하니 뭐 그렇다 치자.

 

- 월 스트리트(Wall Street): 월가(Wall街)

 

이건 대체 뭔가? "담길" 정도의 순우리말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벽가(壁街)"라고는 써야 상식적인거 아닌가? (아, 물론 최근의 원어발음 그대로 쓰기 규칙을 따른다면 "월스트리트"라고 써야 하지만 지금은 "줄임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넘어가자.) 중국어 사대주의자들의 집합소인 신문사에서 어찌 저런 망측한 합성어를?

최근에는 미국어 사대주의(영어? 절대 아니다. "미국어"다)가 중국어 사대주의를 넘어섰다더니, 그 현상인건가?

 

이 쯤에서 월 스트리트의 의미를 백과사전에서 한번 찾아봤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 미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위치한 뉴욕 시 맨해튼 구의 남부 구역에 있는 거리.

 

브로드웨이로부터 이스트 강까지의 단 일곱 블록으로 이루어진 좁고 짧은 거리이다. 그 이름은 1653년 네덜란드인 정착자들이 예상되는 영국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쌓은 토벽(土壁)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이미 미국의 금융 중심지로 알려졌다. 월가 금융지구에는 뉴욕 증권거래소, 아메리카 증권거래소, 투자은행, 국채 및 주채(州債) 거래업소, 신탁 회사, 연방준비은행, 많은 공익사업체와 보험회사의 본사, 그리고 면화·커피·설탕·코코아 등이 거래되는 국제적인 상품거래소 등이 몰려 있다. 또한 이 지구는 미국 증권회사들의 본거지이다. 월가는 거대하고 복잡한 금융거래와 투자의 범세계적인 표상으로 현대의 신화가 되고 있다. 19세기 인민당원들에게 월가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탐욕스런 악덕 자본가의 상징이었다. 번영기에 월가는 일확천금에의 길을 상징했으나, 1929년 주식시장의 엄청난 붕괴 후에는 국가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금융 조작자들의 요새처럼 보였다.

 

의미상으로 보면, 딱 "벽가"라 쓰는 것이 맞네. "벽가"가 가진 다른 의미의 동음이의어도 없는데 한자 그대로 써갈기기 좋아하는 신문에서 "壁街" 대신에 어쩌 저런 조잡스런 국적 불명의 조합어, "월街"를 썼을까? 덕분에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이젠 "Wall Street"를 읽을 때 "월가"라고 읽게 되었다. 젠장... 그런 식이라면 "East Street"는 "이스트가"고 "Dolphin Street"는 "돌핀가"냐? 그럼, "18th Street"는 뭘로 읽을래? "에이틴쓰가"?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 "연예"조차 "예능(藝能)"이란 일본식 한자어로 "줄여"버리는 언론들이 말을 더 이상 줄일 수 없으면 어떻게 희한하게 조합신공을 발휘하는지 잘 봤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글 발음상 길이가 같으면 이제는 한자보다도 미국어를 우선해서 쓰기로 일제히 말을 맞춘건가?

 

월가.

월가..

월가...

월월월~ 우우우우...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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