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조선에는 '주인을 죽이는 노비들의 모임'이 있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이산>의 살주계, 어떻게 봐야 할까?
▲ 드라마 <이산>에서 정국을 미궁 속에 빠뜨린 연쇄살인사건
ⓒ MBC 살주계
살해된 중신들의 시신에 새겨진 '又'
최근 드라마 <이산>이 잠시나마 연쇄살인사건의 미궁에 빠졌었다. 살해된 중신들의 시신에 우(又)자를 새겨 넣는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개혁군주 앞에서 목을 뻣뻣이 세우던 노론 중신들도 막상 살인의 위협 앞에서는 다들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홍국영의 짓"이라고들 했지만, 홍국영이 구속된 뒤에도 공조참판이 살해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다들 촉각이 곤두선 상태에서 박대수·서장보·강석기 3총사가 진범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린다.
세상에 공개된 연쇄살인의 주역은 알고 보니 살주계(殺主契)라는 조직이었다. 문자 그대로 '주인을 죽이는 노비들의 모임'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주죽모'라고 할까. 이상은 드라마 <이산>의 최근 내용이다.
잠시 동안 <이산>을 미스터리 수사극으로 만든 살주계. 드라마의 배경인 정조 집권 초기로부터 근 100년 전인 숙종 시대에 실제로 살주계라는 조직이 출현한 적이 있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숙종 10년(1684) 이후 민심이 크게 동요하면서 각종 계(契)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그 와중에 살주계라는 조직도 생겨났다고 한다.
살주계에 참여한 노비들 중에는 전 형조·예조·호조판서인 목내선(1617~1704년)의 노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포도청에서 7, 8명을 체포해 보니 이들이 모두 다 검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장 조직이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을 토대로 할 때에, 이 조직은 혁명적이거나 반체제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반사회적인 수준에 그친 모양이다. 왜냐하면, 포도청에서 압수한 이 조직의 책자에 적힌 '조직 목표'가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이다.
'살주계'는 실존했던 무장 조직
'양반을 살육할 것'이라는 조항만 보면, 살주계가 혹 반체제 조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 등의 조항을 읽게 되면, 단순히 불만 해소를 목표로 결성된 조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물론 포도청에서 이들을 단순한 흉악범죄조직으로 매도하기 위해 증거물들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들은 한성 남대문 등에 "우리를 죽이지 못하면 종말에는 너희들 배에다 칼을 꽂고 말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대자보까지 걸어놓았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서는 살주계 회원이 "장차 난리가 일어나면 우리도 양반을 아내로 맞을 수 있다"면서 "양반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 심히 좋다더라"는 말까지 했다가 그 지역 양반에게 곤장 50대의 사형(私刑)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조가 즉위하기 오래 전에 조선사회에서는 이미 살주계라는 조직이 출현했었고 이 조직에 관한 이야기가 정조 시기까지도 여전히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조 시대의 노비들 중에 '살주계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 드라마 <이산>에서 연쇄살인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된 홍국영.
ⓒ MBC 홍국영
노비가 잔심부름만 하는 존재라는 편견은 버려!
<이산>의 최근 방영분에서 숙종시대 살주계를 모티브로 미스터리 수사극을 구성한 것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너무 고전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노비' 하면 흔히 양반 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산>에 등장한 호조판서 같은 악독한 주인을 만나면 혹독한 고생을 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탈출하거나 복수를 시도하는 존재 정도로 노비는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광범위한 노비계층이 존재했다는 점, 어떤 때에는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하는 연구도 있다는 점, 또 미야지마 히로시(전 동경대 교수)의 <양반>에 나온 것처럼, 한 가문에 700명 정도의 노비가 소속된 경우도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비의 숫자가 그처럼 많았고 한 가문에 노비가 700명씩 소속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은, 노비들이 단순히 마당이나 쓸면서 잔심부름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생산에 참여한 계층이었음을 보여준다.
현대인들은 양반 가문(家門)의 가(家)를 현대의 '가정'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통시대의 가(家)는 하나의 경제 단위로서 기능하는 곳이었다. 그 가(家)는 주인의 가족을 포함해서 많은 수의 생산 담당자(주로 노비)들이 함께 사는 경제 단위였다.
일본의 씨(氏)가 사회·경제 단위였듯이, 한국의 가(家)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비들이 소속된 가(家)라는 곳은 주인집 가족이 사는 곳이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생산조직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역사인식이다.
웬만한 양반 관료보다 더 나은 생활하기도
노비들이 경제 단위인 가(家)에 소속되어 집단으로 생산을 담당했다는 것은, 다소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회사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이 회사(社)에 소속되어 생산을 담당하듯이, 과거의 노비들도 지주의 가(家)에 소속되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노비 숫자가 700명씩이나 되는 가(家)에서는 '이사급'이나 '부장급' 같은 고위층 노비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노비들은 웬만한 양반 관료보다도 훨씬 더 괜찮았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회사에서 이사로 근무하는 '고위층 노비'가 구멍가게를 하는 자영업자나 웬만한 공무원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물론 현대의 회사원들은 자유계약에 기초해서 또 신체의 예속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노비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법으로 자유를 보장받았다 해서 현실에서도 반드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아니, 조선시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비였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정말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현대 회사원들의 삶도 먼 훗날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억압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마 그들도 "아니 대한민국 시대의 회사원들은 저런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 회사원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요즘 며느리들은 "옛날 며느리들은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하지만, 옛날 며느리들도 그 나름대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마 몇 십 년 뒤의 며느리들이 요즘 며느리들을 두고 "어떻게 저렇게 살았을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과거 조상들이 겪은 고통을 과대평가하는 한편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억압받는 생산계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기 시대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런 '착각'이 없다면, 부조리한 생산관계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는 노동자 대 사용자의 관계와 비슷
아무튼 조선시대의 노비들이 현대의 회사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은, 주인(사장님)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단순히 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주인이 내 누이를 겁탈했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사적 원한을 넘어서는 공적 원한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가 생산관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주인에 대한 노비의 원한 역시 결국 그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런 원한은 노비의 생활 혹은 생산조건이 지나치게 열악하거나 또는 생산의 결과물을 주인이 독식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요즘 말로 하면 노동조건이 너무 열악하거나 혹은 임금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에 주인에 대한 노비의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지주에 대한 노비들의 분노는 결국 악덕 기업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와 같은 것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분노가 균형을 잃고 과도하게 분출된 경우가 살주계와 같은 조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극에서 노비를 단순히 잔심부름꾼 정도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생산의 주요 주체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간과한 데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사극에서는 자유 농민과 함께 예속 노비의 경제 상황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미국의 저명한 한국사 학자인 제임스 팔레(워싱턴대학 한국학 명예교수)처럼 조선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파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비와 노예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학문적 접근법'은 결과적으로 한국민들의 자주성 혹은 주체성을 은연중에 부정하려는 제국주의적 세뇌를 위한 '정치적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제임스 팔레처럼 조선시대의 노비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한편,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노동자 대 사용자의 관계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조선시대의 생산관계에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2008.03.26 09:26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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