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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인물과 사상 2003년 8월호 - 인물과 사상사 (2003-08) (읽음: 2003-08-06 08:09:00 PM)

- 약간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만?) 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여전히 그 날카로운 글들을 갈겨대지만 좌우당간 아군부터 시작해서 적군까지 그 어느 하나 제대로 알아듣는 이 없이 홀로 독야청청하고... 

- 이번 글은 노무현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여러 인물들을 더 강하게 비판한 글들이 눈에 확 띄었다. 뭐 올해들어 늘 그렇긴 하지만. 나도 언뜻 읽고는 '이건 아닌데...' 싶었던 홍세화의 글에 대한 반박을 비롯하여 한성대 총장으로 있는 한완상씨의 글... 마치 민주당 기관지를 보는 듯 해서 조금은 민망하기도 하다. 

- 딱 두 대목. 

"노 정권이 어떤 행동의 결단을 취했을 때 생각 차원에서 이런저런 점을 다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서 노 정권의 결단이 옳을 거라는 게 아니다. 노 정권에 대한 비판은 그 과정까지 염두에 둔, 한 걸음 더 나아간 비판이면 좋겠다는 것이다. 
좀 쉽게 말하자면, '51 대 49'의 결단을 '100 대 0'의 결단이라는 식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대한매일]의 논설위원 우득정이 6월 17일자에 쓴 <왜 투쟁공화국인가>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에 공감할 수 없겠는가. 
'김영삼 정부 시절 개혁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 도문 후유지가 개혁을 소재로 다룬 역사소설 <불씨>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후유지는 또 다른 개혁 역사소설 <51 대 49>에서 주인공 쓰구노스케의 말을 빌려 개혁을 이렇게 표현한다. '매사에 내가 결단을 내릴 때 주변의 상황은 항상 51 대 49였다. 찬성과 반대는 2표 차이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결단할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참여정부'라는 명칭에 걸맞게 참여의 장은 최대한 펼쳐주되 필요한 순간에는 '51 대 49'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p. 98) 

내가 원했고 또한 많은 이들이 원했던 '민주정부'는 다수결의 원칙에 충실한 그런 민주주의를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옳은 일은 하는, 그런 민주정부였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건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아닌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라고 단정을 짓고 들어간다면, 다수의 의견을 멀리하고 소수의 의견을 좇아 행하는 것은 권위주의이며 나아가 독재의 징후가 아닌가! 그래서 의견의 상충되는 구성원을 지닌 지도자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가치관에 따라 '소수일 수밖에 없는' 옳은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더 강하게 일기도 하지만... 

"마키아벨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나쁜 수단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좋은 수단으로 좋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간파했듯이,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어쩔 수 없이 나쁜 수단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나쁜 수단을 탓하기보다는 그런 수단을 통해서라도 좋은 목적을 이루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p. 188) 

"마키아벨리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라는 오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 '공익적'이며 '올바른'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단다. 그런데 과연 공익적인 것,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앞의 예문과 연결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다수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일까. 소수가 원하는 것이더라도 공익적인 것일까. 그걸 판단하기엔 너무나도 세상이 혼잡해졌고 너무나도 '다양'해져 버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리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다수이건 소수이건 가난하고 힘없고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편에 서서 일하는 것이 진정으로 공익적이고 올바른 것이라고.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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