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4월 23일] 유권자는 '욕망'에 투항했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제18대 총선 결과를 ‘욕망의 정치’로 보는 주장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수도권의 표심을 뉴타운을 비롯한 개발주의 기대심리와 연결시켜 그렇게 보는 것 같은데, 재미있는 건 주로 이번 선거 결과에 실망한 사람들이 그런 분석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주장은 타당한가? 물론 타당하다. 그렇지만 하나마나 한 말이다. 언제 ‘욕망의 정치’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이전엔 ‘이타성의 정치’였단 말인가? 그걸 모르고 하는 말같지는 않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런 성향이 두드러졌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게다.

 

■ 총선 패자 쪽의 개탄과 우려

 

유권자가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투표를 했다면, 그건 반겨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욕망의 정치’를 말하는 이들은 환영보다는 개탄과 우려 일변도다. 그래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만큼 이익이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며, ‘욕망의 정치’가 헛된 기대라는 걸 지적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정치’가 아니라 ‘착각의 정치’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그들이 굳이 ‘욕망’이라는 말을 쓰는 건, ‘욕망’은 늘 ‘착각’을 수반할 정도로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욕망’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전제는 ‘욕망’을 철저히 물질 위주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에는 잠자고 있던 욕망이 이번 총선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는 식이다. 독선과 오만으로 똘똘 뭉친 ‘인정 욕망’도 좀더 잘 살고 싶어 하는 ‘물질 욕망’ 이상으로 끈적끈적한 게 아닐까?

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라 믿지만, 이번 총선 결과를 그렇게 분석해 버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굳이 찾자면 두 가지 뿐이다. ‘욕망’을 정면 공격하거나 ‘욕망’에 편승하는 것 뿐이다. ‘우리의 잘못’은 없으며, 모든 건 ‘그들의 욕망’ 때문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욕망의 정치’보다는 이렇게 ‘배움이 없는 정치’가 더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인정 욕망’과 ‘물질 욕망’은 분리돼 있는 게 아니다.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공적 위치에 서게 되면 ‘억대 연봉’은 자연스럽게 굴러 들어온다. ‘욕망의 정치’라곤 하지만, 뉴타운에 열광한 유권자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꿈꾸는 건 ‘억대’에 불과하다. 왜 전자(前者)는 물질에 무관심한 척 하면서 ‘억대’를 챙기는 반면, 후자(後者)는 ‘욕망의 화신’인 양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억대’를 꿈꿔야 하는가? 이건 좀 불공정하지 않은가?

전 정권, 전 여당 인사들 중엔 억대 연봉을 고스란히 저축한 이들이 많다. 그래도 남의 돈 안 먹었다고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그렇게 칭찬 받으면서 자기 욕망은 채워놓고 ‘욕망의 정치’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제스처가 아니라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중요한 것은 ‘욕망의 공정거래’

 

지금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左右)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다선 의원이 낙선한 지역의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 하면 많이 해 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유권자들은 정치가 국민을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권자들이 욕망에 투항했다고 보는 건 그 자체로선 타당할망정 차원이 전혀 맞지 않는 분석이다. 정치 자체가 쓰레기통에 처박힐 때, 유권자에게 남은 선택은 아예 투표를 외면하거나 정당들을 돌아가면서 난타하는 응징 뿐이다. 괜한 욕망을 탓하기보다는 ‘욕망의 공정거래’에 힘을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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