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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지금 여기 
홍세화 기자  
  
허공에 몸을 던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땅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증언했다면, 일생을 통일운동에 바친 강희남 목사는 자살을 택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총체적 난국을 증언했다. 이명박 정권은 경제를 살린다더니 반민주적 권위주의를 되살렸고, 실용을 주장하더니 이분법적 냉전 이념을 되살렸다. 

오로지 힘의 논리로 무장한 이명박 정권을 떠받쳐주는 것은 공익의 탈을 쓴 사익추구 정치집단인 ‘조중동’만이 아니다. 지배세력에게 ‘지금 여기’의 민생문제는 지금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미래에 성취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제수치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배세력에게 지금 여기의 문제를 회피하게 하는 “민생을 살리는 경제”라는 그들의 주술이 우리 사회에서 폭넓게 관철되는 것은 왜일까? 오직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을 펴고 ‘비즈니스 프렌들리’에 충실할 뿐인 ‘강부자’ 정권이 민생을 말하는 역설이 통하는 것은 왜일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인가?”라고 물은 톨스토이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스스로 답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인 ‘바로 지금’을 온통 저당 잡힌 채 사는 것은 우리 학생들만의 일이 아니다. 안전망이 허술한 사회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을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구성원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하겠다는 일념으로 오늘을 저당 잡힌 삶을 살아간다. 미래에 저당 잡힌 오늘의 일상 속에서 ‘오늘의 나’에게 성실할 수 없고, 이웃에게는 더구나 성실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그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기보다 외면하는 경향을 갖는다. 사회구성원들은 점차 ‘이웃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했고 민생 문제를 지배세력이 요구한 대로 지금 여기가 아닌 미래의 일로 돌리는 데 동참했다.

 

양극화 사회에서 소득격차가 격심해지고 비정규직의 노동조건과 서민들의 삶의 조건이 열악해져도 지금 여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에 해결할 문제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점점 멀어진 사람들의 눈에 140일이 지난 오늘까지 장례도 치르지 못한 용산 참사나 건당 30원 인상 요구를 거부당하고 해고당한 대한통운 택배노동자 박종태씨의 삶과 자살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 거꾸로 지금 여기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을 지배세력이 미래를 그르친다면서 억압할 때 침묵하거나 동참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의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혁명적 미래지향 또한 지금 여기의 문제를 미래의 문제로 돌리는 데 일조한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은 백번 옳다.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주인만 바뀔 뿐 지배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는 혁명의 과정 없이도 구조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이룩하려면 ‘지금 여기’의 문제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탈정치가 혐오스런 정치를 극복할 수 없듯이 무관심은 결코 중립이 될 수 없다.

 

20대 중반에 나치 수용소에 갇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일흔 가까운 나이에 결국 자살을 선택한 프리모 레비는 괴물은 분명 있지만 위험할 정도로 숫자가 많지 않다고 했다. 정작 위험한 것은 의심도 품어보지 않고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이라고 했다. 서울대 교수들의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어버이’들이 보여주는 열성에 비해, 또 우리 집 초인종을 마구 두드리는 “함께 교회 가자”는 사람들이나 돈 줄 테니 “‘조중동’을 구독하라”는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열의와 관심을 갖고 있을까. 지금 여기의 문제에 관해.


홍세화 기획의원hongsh@hani.co.kr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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