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가 컸다. 노무현과 이회창. 2002년 대선에서 두 사람의 말은 그랬다. 한 사람이 성장을 말할 때, 분배를 공약했다. 한-미 동맹 강화를 말할 때,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겠다고 공언했다. 무릇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하지만 역사적 가정은 새로운 상상력을 열어주기도 한다. 잠시 가정해 보자. 이회창 정권이 들어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임을 전제하고 그려보자.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부익부 빈익빈은 무장 깊어간다. 중산층이 시나브로 무너지고 아이들과 자살하는 빈민도 나타난다. 그런데 대통령 내외는 골프를 즐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줄이어 자살하는데도 모르쇠했다. 반면에 대통령은 대통령 봉급(혈세)을 꼬박꼬박 모아 재산을 불린다.
 

민주시민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볼까. 그뿐인가. 권력이 일부의 비리를 빌미삼아 민주·노동 운동 전반을 싸잡아 매도한다. 부자신문도 곰비임비 나팔 불며 정권을 거든다. 대책 없는 농업개방에 항의하는 농민, 칠순에 이르도록 평생 소작을 해온 농부를 공권력이란 이름 아래 국회 앞 아스팔트에서 때려죽인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빚은 이라크 침략전쟁에 반대여론을 모르쇠하고 참전한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도 전격 합의한다. 그럼에도 언죽번죽 자신들은 힘이 없고 야당과 언론 탓이라고 언구럭을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회창 정권의 운명은.

 

저 눈부신 민주운동의 전통을 체화한 민중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터다. 대학가와 노동현장, 한길과 들녘에서 정권 퇴진 투쟁이 여울여울 타오를 게다. 이회창 정권을 두남두며 장·차관과 국회의원이 된 먹물들은 어용 지식인으로 벅벅이 비판받을 법하다.

가정에서 다시 현실로 오기는 쉽다. 앞서 서술한 가정문에서 ‘이회창’만 ‘노무현’으로 바꾸면 된다. 그렇다. 바로 노무현 정권이 집권 3년 동안 해온 일이다. 차라리 이회창씨에겐 억울한 가정일 수 있다. 최소한 그는 우왕좌왕하거나 자기모순은 없었을지 모른다. 재벌 중심의 성장 정책과 노동 탄압,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서 생뚱한 말로 본질을 흐리진 않을 성싶다.

 

현실을 직시할 때다. 말과 행동도 구별해 읽어야 옳다. 냉철히 톺아보라. 노무현 정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거사법이나 사학법이 상징하듯이 분명 한나라당과 다른 치적은 있다. 하지만 민중 생존권에 이르면 전혀 아니다. 양극화가 더는 덮어둘 수 없는 문제로 떠오르자 대통령은 생색을 낸다. “지지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문제를 회피하지 않기로 하고 양극화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기”한단다. 회피하지 않는다며 겨우 ‘의제로 제기’다. 실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남은 임기 ‘전력투구’다. 양극화 해소를 다짐한 직후에 비정규직 확대 법안을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배짱을 보라. 집권 3년 동안 3억5천만원을 불린 대통령 일가에게 불우이웃 돕기도 하지 않느냐고 묻는 누리꾼의 비난은 그저 비아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시민단체들은 고요하다. 이회창이 아니라 노무현이 대통령인 까닭이다. 정권의 실정을 옳게 비판해도 궁딴다. ‘민주노동당 시각’이라며 정파적 해석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그래서다. 정권은 자신의 무능과 불성실을 야당과 부자신문 탓으로 지청구삼는다. 노동자와 농민의 외마디 절규를 생먹는 대통령이 ‘야당 하고 싶다’고 투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이회창 정권이라면 더 늦기 전에 민심을 수습하라고 건의하는 참모라도 있지 않았을까. 노 정권의 참모들은 정반대다. 국민에게 도와주지 않았다고 되술래잡는다. 그렇다. 노무현과 이회창. 차이는 크다.

 

손석춘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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