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5월 28일] 소통의 정치경제학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요즘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많아진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뿌리’를 외면한 채 ‘나뭇잎’만 논하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지만, 그 실천 이념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뜻이 서로 통하지 않더라도,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세월에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법 하다. 많은 이들이 소통을 ‘홍보’로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통의 개념부터 재인식해야

 

우리는 지도자의 소통 능력을 문제 삼는 일엔 익숙하지만,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높게 평가하는가 하는 점은 외면하고 있다. 한국은 ‘빨리빨리’에 중독된 사회다. 소통은 시간이 좀 걸린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과감한 결단’과 ‘저돌적 추진’의 적(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소통의 귀결로 여겨지는 타협과 화합은 우선적으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조정될 때에 가능하다. 그걸 외면하고 명분만으로 일을 풀려고 하는 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그런데 우리는 매사를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려는 기질을 갖고 있다. 오죽하면 이미 80여년 전 단재 신채호가 “도덕과 주의(主義)가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是非)에서 났느냐” 하는 질문을 던져놓고,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고 개탄했겠는가.

우리가 진정 소통을 원한다면, 그 정치경제적 기반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인프라’를 외면한 채 소통 부재의 책임을 개인과 집단에게만 물어선 답이 나오질 않는다. 가장 문제되는 게 바로 ‘승자 독식주의’다. 승자가 독식을 하는 체제 하에선 소통은 미덕이 아니다. 전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무조건 이기면 되는 것이지, 소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국은 ‘승자 독식주의’에 ‘초강력 1극 집중구조’가 더해져 소통은 ‘악덕’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니 소통의 의미가 180도 바뀌어 버린다. 그건 번지르르한 말솜씨로 자신을 마케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화 한 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줄서기’의 능력이다. 아첨 능력이다.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쓰는 소통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마당발’이 소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아니다.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우리는 ‘사적 소통’과 ‘공적 소통’을 혼동하고 있다. 공적 소통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낯선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과 관련된 개념이다. 우리는 ‘공적 소통’을 희생으로 하여 ‘사적 소통’에 모든 걸 다 바치는 사회다. ‘공적 신뢰’는 없으면서도 ‘사적 신뢰’는 발달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이다.

승자 독식주의를 깨지 않고선 소통은 살아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정치 바람을 타지 않는 중립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 대통령 바뀌었다고 모든 공적 영역의 리더들을 갈아치우는 건 자멸(自滅)로 가는 코스다. 그것에도 그 나름의 장점은 있겠지만, 줄서기와 아첨을 융성케 해 소통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소통의 원흉이다.

 

정치바람 안 타는 중립영역을

 

정치시장에선 ‘소통을 거부하는 강한 주장’이 잘 팔리기 마련이다. 이는 ‘중간파’가 수난을 당했던 한국 근현대사가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언론도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보수ㆍ진보를 초월해 ‘독선ㆍ오만의 상품화’에 능한 사람들의 인기에 편승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정권 하에서건 공무원은 온전한 ‘영혼’을 누릴 수 있고, 내부고발은 찬양ㆍ고무되어야 한다. ‘소통 대한민국’으로 가자.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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