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부모를 누가 이렇게 세뇌를 시켰을까" "서사창작과? 그게 잘못된 과거든" 6월 3일, 한예종 문제 관련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학부모에게 막말을 해 물의를 빚고 있는 유인촌 장관. | ⓒ 한예종비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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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문화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학부모를 향해 "세뇌 당하셨네요"라고 말하는 장면. 사실 문화부에서 '세뇌'라는 말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촛불정국에 문화부 홍보지원국 직원 12명의 '정책 커뮤니케이션 교육' 강의자료로 사용된 문건에는 이미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하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대중은 멍청, 인터넷 매체 몇 푼 쥐어주면 돼' 미디어오늘 2008/05/28) 어록의 압권은 역시 작년에 국회에서 퍼부었던 폭언. 자신을 'MB의 졸개'라 부르는 야당 의원의 발언에 유장관은 "성질이 뻗쳐서" 애먼 사진기자들을 향해 예의 반말을 지껄였다. "찍지 마! 찍지 마!" 그 뒤로는 들어주기 남세스런 상스러운 표현도 이어졌다. 황당하게도,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유장관은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을 새 정부 문화정책의 모토로 내세운 바 있다. ('柳문화, 품격 있는 문화국가 만들겠다' 연합뉴스 2008/09/03) 부족한 교양이 낳은 이 우발적 사건들이 동시에 MB 문화부의 본질을 보여준다. 가령 (1) "대통령께서 만들어주신 거야." MB 정권 아래서 문화부는 실제로 정권의 치적을 홍보하는 기능을 맡았던 3공 시절의 문화공보부로 전락했다. (2) "세뇌 당하신 거예요." MB 문화부는 실제로 3공 시절처럼 국민을 계몽과 홍보, 심지어 세뇌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3) "성질이 뻗쳐서." 국회에서,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장관이 드러낸 이 야성. 그가 지난 1년 반 동안 문화계에서 행해진 이념테러 역시 그 못지않게 거칠었다. 문화부, 3공화국 문공부로 돌아가다 왜 문화부가 졸지에 문공부로 전락한 걸까?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제도적 원인. 국정홍보처를 문화부에 통합시켜버리다 보니, 문화부 장관이 꼴사납게 정권홍보를 주업무로 삼게 된 것이다. 둘째는 이념적 원인. 3공 시절에 갇힌 MB의 상상력은 문화를 국정홍보의 수단 정도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셋째는 인격적 원인. MB는 유장관의 영웅이다. 의식적으로 MB를 닮으려 하니("오랫동안 옆에서 봤기 때문에 내가 닮아간 것" 한겨레 2009/07/03) 문화부가 MB의 친위대처럼 될 수밖에. 3공 시절에나 보던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건 그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3공화국 정부는 종종 유명가수를 정권의 홍보에 동원하곤 했다. 또 그 시절 가수들은 음반의 끝에 반드시 애국심을 고취하는 '건전가요'를 끼어 넣어야 했다. MB 정권의 복고 취향은 이 해괴한 관행을 오늘에 되살려낸다. 청와대는 전문가에 의뢰해 일명 '힘내라! 대한민국' 등의 랩송 등을 제작한 뒤 인기그룹 '빅뱅'을 비롯한 여러 유명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부르게 하는 방안을 연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라사랑 랩송은 경제위기 극복에도 적잖이 도움이 될 것으로 청와대는 기대하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국민적 단합이 절실한 상황에서 (...) 애국심 고양 및 국민통합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靑, '나라사랑 랩송 만든다' 연합뉴스 2009/02/15) 나라사랑 랩보다 우스운 것은, 그게 "애국심 고양 및 국민통합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청와대의 믿음이다. 대중은 거국적 비난으로 이 야무진 믿음을 사정없이 비웃었다. ('랩으로 애국심 고양? 유치하다' 헤럴드 생생뉴스 2009/02/17) 저런 식으로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게 정권의 문화감각이다. 문화를 담당하는 주무부서는 좀 나을까? 그 밥에 그 나물, 촌사마의 감각도 다르지 않다. (이게 다) "젊은 층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 아니겠냐." ('여론의 된서리 맞은 나라사랑 랩송' weekly경향 200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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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촌 장관이 2일 오전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기자실에서 열린 '2009년 문화부 상반기 주요 성과 및 향후 추진과제 발표' 기자회견에서 '관제홍보 부활', '여성 비하' 비판을 받고 있는 '대한늬우스 - 4대강 살리기' 극장상영과 관련해서, "예전의 '대한뉴스' 형식을 패러디한 하나의 개그이지 않냐"며 비판여론을 반박했다. | ⓒ 권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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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의 감각이 이 지경이니 '대한 늬우스' 소동은 예정된 사고였던 셈이다. 국민의 혈세 2억을 잡아가며 야심차게 추진한 이 계획 역시 네티즌들의 거센 비난에 부딪혔다. 그러자 문화부에서 부랴부랴 다음 아고라에 해명 글을 올렸다. '대한늬우스'라는 단어는 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함을 주기 위한 광고기법 차원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 문화부는 광고 상영에 앞서 영화관 주수요층을 대상으로 반응조사를 한 바 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재미있다, 이해하기 쉽다고 답했으며, 또한 내용 표현방식에 대해서도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문화부, '광고는 광고일 뿐 오해하지 말자' 2009/06/25) 이런 광고를 보고 "재미있다, 이해하기 쉽다"며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영화관 주(主)수요층"은 도대체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 (문화부에서는 멍청한 대중만 따로 추려 반응 조사용 마루타로 관리하나 보다.) 문화부만 아는 '주'수요층 말고, 대부분의 국민으로 이루어진 '부'수요층의 반응을 보자. "백 투 더 퓨쳐"(뷰스앤뉴스 2009/06/24), "히틀러 라디오에 히틀러 늬우스"(프레시안 2009/06/24), "국민 바보로 아는 대한늬우스"(한겨레 2009/06/24),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블랙코미디"(오마이뉴스 2009/06/25), "시대착오적, 강압적" (노컷뉴스 2009/06/25) "눈물이 날지언정 크게 한번 웃자"(업코리아 2009/06/25), "이제 하다하다 별걸 다해" (폴리뉴스 2009/06/25) "정부가 왜 욕을 얻어먹는가 했더니" (국민일보 2009/06/26) "유인촌의 실패한 촌티 전략"(미디어스 2009/06/26), "대한늬우스, 또 다른 소통부재"(헤럴드경제 2009/06/26) "대한늬우스는 또 뭔가"(중앙일보 2009/06/26) 대한 늬우스, 과거로의 회귀 (경향신문 2009/07/02) 정권의 퇴행적 감성은 사사건건 대중의 세련된 감성과 충돌하며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다. 이 문화지체(cultural lag)가 어디 청와대나 문화부만의 문제일까? 최근 국정원에서도 이에 질세라 노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빈티지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이로 보아 이 퇴행적 취향은 얼빠진 한 두 개인 혹은 넋 나간 한 두 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MB 정권 전체에 공유되는 일반적이며 보편적 감성인 듯하다. '안보신권' 이벤트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 '안보신권 필살기를 연마하라' 코너에는 5명의 간첩을 찾는 게임이 등장한다. (...) 이를 접한 한 네티즌들은 "유치원생들 그림 맞추기를 한다고 안보의식이 생기겠느냐"며 "저런 문제를 내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합성사진인줄 알았는데 국정원이 실제 실시하고 있는 행사라니 놀랍다"며 "조만간 남한판 '5호 담당제'가 시행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국정원 이벤트 안보신권, 네티즌 질타' 노컷뉴스 2009/06/24) 6, 70대 노인들이 가진 70년대 콘텐츠를 억지로 2,30대 디지털 세대의 표현형식에 담다 보니, 거기서 해괴하기 짝이 없는 문화적 에얼리언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나라사랑 랩, 대한늬우스, 안보신권. 다음에는 또 어떤 괴물이 탄생할까? 이 관제 하이브리드 문화를 유장관은 "젊은 층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라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MB정권도 "젊은 층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절실히 원한다. 문제는 방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젊은 세대를 향해 '미래'로 가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를 자신들이 있는 '과거'로 끌어당긴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문제는 이 미션 임파서블에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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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회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대한늬우스 상영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체육관광부를 정부의 꼭두각시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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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의 '정책 커뮤니케이션' 거참 희한하네 국민을 홍보와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6~70년대 산업화 초기의 습속이다. 당시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교육수준도 높지 않았기에 계몽과 홍보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국민의 대다수가 정보 프롤레타리아이고, (MB도 한탄하듯이) 고졸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가는 과잉교육의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낡은 산업혁명의 자식들이 디지털 혁명의 자식들을 가르치겠단다. 이건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 한 마디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문명을 가르치려 드는 격이다. 눈 뜨고 봐주기 민망한 '대한늬우스'를 놓고, 문화부 제2차관은 "어쨌거나 이슈화되지 않았냐", "광고를 잘한 것"이라 말했단다. ('문화부 4대강 대한늬우스 자화자찬 파문' 미디어오늘 2009/07/02) 내친 김에 '대한늬우스' 2탄도 극장에 걸 작정이란다. ('대한늬우스 2탄, 이 달 25일부터 상영' 조선일보 2009/07/01) 반발을 하든 말든, 그냥 가겠다는 얘기다. 황당한 것은 문화부에서는 이런 짓을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증세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앞으로도 정부 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홍보 방안을 강구하여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대한 늬우스 15년만 부활…문화부 "대화가 필요해"' 서울신문 2009/06/24) 이 문화부의 처방을 뒤집으면, '그 동안 국민과 소통이 안 된 것은 정부 정책이 너무 어려워 국민이 편하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진단을 얻게 된다. 한 마디로 국민들이 우매하다는 얘기다. 그 문건 속의 구절이 생각나지 않는가?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 이런 생각이야말로 문화부에서 개그맨을 동원해 대한늬우스를 찍는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지도 모른다. 최근 문화부의 행태는 문화부 홍보지원국에서 유출된 그 문건을 연상시킨다. (작성자는 이게 공식적 강의 자료가 아니라, 강의를 위해 잠깐 열었던 개인파일이 사고로 노출된 것이라 해명해 왔다.) 그 안에 소개된 내용들은 거의 괴벨스의 선전선동 전략을 연상시킨다. 위에 인용한 기사('대중은 멍청, 인터넷 매체 몇 푼 쥐어주면 돼' 미디어오늘 2008/05/28)에 문건의 전문이 실려 있으니, 일독해 보시기를. '정책 커뮤니케이션'이란 게 원래 야비하기 그지없는 것일까? "대중은 조작과 영합의 대상", "이해찬 세대는 부리기에 유리한 집단", "인터넷게시판은 가난한 이들의 한풀이 공간", "비판적 미디어비평 기자들 엉겨주면 뿌듯해해", "복잡한 방송판 기생집단 활용해 관리". 마키아벨 리가 환생한듯하다. "주둥아리로 출세하는 방법"이라는 항목이 눈길을 끈다. 배워서 출세 좀 할까 들여다봤다가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혹시 이게 문화부의 인터넷 낭인 채용규정(?)이었던 건 아닐까? "가급적 사람들이 잘 아는 '센 놈' 하나를 골라 밟아야 잘 뜬다. 몸값이나 Media 역량이 안 되면 뭉쳐서 떠든다. 정부 위원회, 자문그룹에 마지못한 척 낀다. 조금밖에 몰라도, 떠들다 보면 남들이 전문가라고 하고 정보도 생김. 무작정 / 좌우간 한쪽 편을 골라서 떠든다. 사냥개는 생각이 필요 없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은 불러서 쓰는 놈도 헷갈려. 진영논리에 충실해야 낙전이라도 주워 먹는다." ('공공갈등과 정책 커뮤니케이션의 역할' 2008년 2008년 5월) 최근 권력의 사냥개가 되어 천방지축 날뛰는 자들의 인생철학이 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밤하늘에 별이 스치우듯, 문득 머릿속으로 얼굴 하나가 스치운다. 문화부의 MB식 예술관 문화부의 주업무인 예술정책으로 넘어가 보자. 정치적 수구는 문화적으로도 수구여야 하나? 정치적 입장과 문화적 감성 사이에도 모종의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한겨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유인촌 장관은 한예종의 학생을 물리친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결국 '예술학교에서 왜 이론을 가르치냐'고 하던 무식한 문화판 뉴라이트 논리의 반복이다. 최근 만난 무용원 학생이 '통섭은 트렌드이고 앞으로의 예술 방향인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하길래 '발걸음 걷는 연습부터 해라. 명인들이 평생 발 올리는 연습을 한다.'고 말해줬다. 기량을 먼저 익혀야 한다. ("연극인 시국선언 땐 딱 관두고 싶더라" 한겨레신문 2009/07/02) MB의 낡은 산업화의 관념이 유장관의 입을 통해 예술론으로 환생했다. 기량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기량만으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서커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하고, 폴록이 화폭에 물감을 흘리고, 뉴먼이 화폭을 롤러로 밀고, 폰타나가 캔버스를 송곳으로 뚫고, 미니멀리스트가 철공소에 전화를 걸고, 워홀이 직원에게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케이지가 4분33초 동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데에 과연 얼마나 많은 기량이 필요했을까? 한 사회의 경제수준과 예술의 상태 사이에는 묘한 평행이 존재한다. 가령 70년대 한국은 기능 올림픽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휩쓸곤 했다. 그렇다고 당시 한국의 기술이 세계 최고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몸을 굴려 기량을 연마할 때, 선진국 사람들은 정신을 굴리며 컨셉트를 잡고 있었다. 한국의 예술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가령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한국의 예술가들을 보라. 대부분 연주자나 무용수와 같은 퍼포머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쓰는 창작자는 극히 드물다. 훌륭한 퍼포머도 그저 기량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거기에도 풍부한 교양과 섬세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령 외국에 유학을 간 한국의 학생들은 시험곡은 능숙한 기량으로 소화해내지만, 정작 다른 작품을 해석하라고 하면 당황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이런 예술적 상황은 묘하게도 기술의 상태와 조응한다. 가령 한국의 기술은 (메모리를 비롯한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아직 창의적 기술이 아니라 모방적 기술에 머물러 있다. MB의 예술철학(?)은 더 직접적인 형태를 띄기도 한다. MB의 머릿속에 삽 한 자루만 들어 있다 보니, 문화도 삽질을 하는 걸까? 중앙일보 기자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데 이명박 정부는 문화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고 말하자, 촌사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청계천 복구도 문화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물론 건설이지만 그렇게 환경을 바꿔주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거 아닌가요. 광화문 네거리에 건널목을 만든 거나 서울광장 등 그게 다 문화정책이죠. (...) 4대 강 정비도 마찬가지죠. 수질이 좋아지고 환경이 나아지면 자전거 도로가 생기고 크루즈도 뜨고 국토환경이 바뀌는 건데 (...) 문화정책이 없다는 건 난센스입니다."('파워인터뷰-취임1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일보 2009/04/28) 한 마디로, 삽질이 곧 문화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뭐 하러 문화부를 따로 두는가? '작은 정부'의 모토에 따라 그냥 국토해양부에 통합시킬 것이지. 문화부의 홍인종 사냥 이런 수준의 교양으로 이 나라의 문화예술을 이끈단다. '예술에 왜 이론이 필요하냐'고 묻는 머리들 속의 비전이 오죽 하겠는가. 그리하여 지난 1년간 문화부에서 역점을 두고 진행한 사업이 고작 좌파척결. 전봇대 뽑는 저돌성으로 문화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역시 박힌 사람 뽑는 것뿐이다. 이는 그 자신도 인정한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가 임명한 산하 기관장들을 내보낸 겁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1년간은 이걸 정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았어요." (중앙일보 2009/04/28) 지난 1년 간 "모든 역량"을 쏟아서 한 일이 고작 좌파척결. 그런 이런 기사도 있다. 부산일보 사설이다. 그 일을 하고도 자체적으로 이런 평가를 내렸단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유인촌 장관의 지난 1년간의 업무 평점이 'A' 수준을 상회한다고 자평하고 있다.('문화정책 예산지원도 지방홀대 심하다니' 부산일보 200/02/28) 'A' 수준을 상회한다니, 장관님 점수 매기기 위해 A 앞에 알파벳 문자를 새로 만들어 드려야 할 판이다. 물론 문화부 밖의 평가는 이와 사뭇 다르다. 사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인적 청산 작업 말고는 뚜렷이 부각되는 것도 없다는 게 중론이다. (위의 사설) 문화부 안에서는 A+를 받았으나, 문화부 바깥의 중론은 사람 잡는 일 외에 생각나는 업적이 없다는 것. 한겨레신문의 인터뷰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기자가 "보수 인터넷 매체들의 한예종 공격과 감사 내용 등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지적하자, 유장관은 이렇게 대꾸한다. "학교에서 그런 얘길 많이 하더라. 변희재씨가 공격을 주도하던데, 황 전 총장의 서울대 미학과 후배더라.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다." (위의 기사)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백남준이 독일문화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벤야민이 문화비평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 처참한 교양의 소유자다. 어차피 수준이 비슷해 보이니 만나면 말도 아주 잘 통할 게다. 게다가 평소에 즐겨 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은가. MB 정권이 적어도 한 명의 국민(?)과는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이 소통부재의 시절에 참으로 귀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완장과 명찰의 정치 어떻게 봐야 할까 좌파적출의 메스는 감사. 감사라고 변변할까? 감사의 수준이 거의 개그 콘서트다. '회의실 의자가 열다섯 개인데 왜 세 개를 더 샀냐'(방만한 예산집행), '총장실에 왜 북한 우표책이 있냐'(남북교류협력법 위반), '국회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왜 한강 둔치에 나가 사진을 찍었냐'(근무지 이탈). 그래도 한예종 감사는 양반이다. 영화판에서는 "연간 1000만원 남짓 지원하는 조그만 영화제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다." ('유인촌은 MB가 아니라 우리가 내친다' 시사IN 2009/06/22) 문화부의 이런 조폭적 행태는 당연히 문화계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문화행정은 실종된 대신, 감찰활동은 독재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원에 인색하고 간섭에 능하며, 심지어 공포를 주는 문화부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위기에 빠뜨린 유인촌 장관은 스스로 물러나야 합니다." ('상상력에 자유를! 문화예술의 자율성 회복을 위한 미술인 성명' 오마이뉴스 2009/06/12)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도 나섰다. 낡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어 단죄하고 처형하는 작태는, 마치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이며 독재의 기반을 다지던 과거 독일의 나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 완장 찬 사람들이, 미운 놈이면 아무한테나 명찰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완장과 명찰의 정치를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까지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예술과 학문은 정권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한예종 사태를 염려하는 영화감독 100인 선언 전문' 스타뉴스 2009/06/18) 영화계에 이어 유장관의 옛 '나와바리'에서도 성명을 발표했다. 연극 연출가와 배우 등 연극인 1천37명이 2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연극인들은 시민들과 연대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칠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문화와 예술의 환경조차 관치로써 재단하는 퇴행적 행태는 문화대중 및 예술인의 자존심과 정신적 생명권을 참담한 지경으로 유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현 정부에 대해 (...) 구시대적, 반예술적 문화정책 중단 등을 요구했다. ('연극인 1천여명 시국선언 동참' 연합뉴스 2009/06/25) 연극계에서조차 자신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연극인 시국선언 때는 딱 관두고 싶더라. 명단을 일일이 다 봤다. 그 가운데 내가 가르친 애, 유씨어터에 있던 애도 있었다. 그래서 너무너무 깜짝 놀랐다. ("연극인 시국선언 땐 딱 관두고 싶더라" 한겨레신문 2009/07/02) 심지어 자기가 가르친 제자까지도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상황. 그는 이 상황을 마음속으로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을까? 어쨌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참상이 촌사마께서 단 1년 반 만에 이룩한 업적이라는 점이다. 불도저 같은 그 추진력 하나는 높이 사줄만 하다.
| ▲ 유인촌 문과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해 4월 1일 오후 경기도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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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코드로 볼 때에 어차피 MB 정권에 교양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니, 문화예술은 그렇다 치자. 정권 자체의 기준으로 본 유장관의 직무수행은 어땠을까? 문화부에선 A+라 자평했지만, 정부의 평가는 다른 모양이다. 거기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가 2008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에서 92개 공공기관 중 최하위인 E등급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 이번 평가 결과는 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적지 않게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 더욱 당혹하게 하는 대목은 경영평가 결과에서 '경고' 조치를 받은 17개 기관 중 무려 23%에 해당하는 4개 기관(방송광고공사ㆍ체육진흥공단ㆍ국제방송교류재단ㆍ예술의전당)이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이란 점. (...) 평소에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던 예술의전당 등 상징적인 단체들이 대거 경고 조치를 받음에 따라 (....) ('잘하고 있다더니, 유인촌 장관의 굴욕' 2009/06/19) '작은 정부'를 위해 MB는 국정홍보처를 폐지했다. 관제홍보에 국민의 혈세를 쓸 필요 없다는 문제의식만큼은 지극히 정당하다. 그렇다면 국정홍보처의 기능을 넘겨받은 문화부에서는 홍보예산을 얼마나 절감했을까? '관제홍보는 않겠다'며 국정홍보처를 폐지했던 이명박 정부가 집권 1년 만에 (...) '국정홍보 체제' 강화에 나섰다. (...) 2008년 90억8천만 원이던 예산은 2009년 189억8천만 원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137억 원보다 53억 늘어난 액수다. (...) '관제홍보' 논란도 심해졌다. 문화부는 설 연휴 때 방송법과 '4대강 정비사업' 홍보책자를 수십만 부씩 찍어 귀성객에게 나눠줬다. 한나라당의 언론법 홍보전단 배포에만 (...) 5억3천여만 원을 썼다. 올해 초 대통령실은 '2008 이명박 대통령 어록-위기를 기회로'를 222쪽 전면 컬러로 5천부 찍어 공공기관에 배포하기도 했다. ('귀막은 MB정부 홍보예산 2배로' 한겨레신문 1009/03/16)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간단하다. 소통=홍보라는 70년대 관념 때문이다. 70년대의 이상에 갇힌 머리가 메시아적 사명감에 넘쳐 자신을 민족의 선지자로 착각한다. 국민은 그저 대붕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참새일 뿐. 이들을 설득하려면 당연히 홍보가 필요하다. 마침 모두들 입을 모아 소통이 부족하다지 않는가? '뭐 해? 홍보예산 대폭 늘려.' "앞으로도 정부 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홍보 방안을 강구하여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대한 늬우스 15년만 부활…문화부 "대화가 필요해"' 서울신문 2009/06/24) 그들에게 국민과의 소통은 "다양한 홍보방안"을의 문제일 뿐이다. 2009년 홍보예산 189억. 그 돈은 귀 닫고 입만으로 소통하려 드는 MB의 독특한 버릇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이다. 돈키호테의 꿈? 외부로부터 인풋을 차단하고, 내적 동질성을 강화하며, 밖을 향해 공세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폐쇄적인 정치체제다. MB 정권의 상태도 이와 비슷하다. 가령 "파격적"이라 평가되는 유장관의 기용은 MB식 인사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것은 '코드 정치'와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코드는 서로 맞춰보기라도 해야지. MB는 코드를 맞추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자신의 분신을 원한다. 유인촌 장관을 만나면서는 왜 그가 이명박 대통령과 그렇게 가까운지 궁금했다. (...) MB는 서울시장이 되자마자 서울문화재단을 만들어 유인촌에게 대표를 시켰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장관으로 데려갔다. 파격적이다. 도대체 유 장관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어서? 인터뷰를 하고 나선 나름대로 답을 얻었다. 내가 보기엔 유 장관과 이 대통령은 기질이 같은 사람들이다. ('파워인터뷰-취임1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일보 2009/04/28) 기질이 같아서 그런지, 정치를 모르는 MB와 똑같이 유인촌 장관도 정치적으로 매끄럽지 않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았다. (위의 기사) 이렇게 단점을 장점으로 믿어 버리는 사람 앞에서 국민은 대책이 안 선다. 그 뿐인가? 유인촌이 본 MB의 느낌이란다. 나도 지독한데 '참 나보다 더한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위의 기사) 심지어 지독하기까지 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표 한 번 잘못 던진 죄로 이 두 사람의 독기를 겪고 있는 게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운명이다.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려면 주관적 환상의 힘을 믿어야 한다. 저 홀로 과거로 돌아가 주관적 로망 속에서 시대착오적 영웅문학을 한다는 의미에서 언젠가 MB를 돈키호테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런데 현실은 비유를 그냥 비유로 남겨두는 문학적 여유도 없나 보다. '명박호테'를 사모하는 유인촌 장관의 고백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을 잡는다'는 구절이죠. 돈키호테와 제가 성향이 비슷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꿈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어쩌면 집착일지도 모르지만 예술이 결국 꿈 아닌가요.(위의 기사) 저 달콤한 로망은 MB와 둘이서만 즐기면 딱 좋을 터. 불행히도 "지독한" 그 두 사람의 손엔 권력이 쥐어져 있기에 그들의 '예술'은 국민의 짜증이 되고, 그들의 '꿈'은 국민의 악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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