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식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미국 여행을 바탕으로 해서 1986년에 출간한 『아메리카』는 미국에 관한 그의 독특한 시선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뉴욕 마라톤 감상기가 흥미롭다. 그는 1만 7000명이 엉켜서 뛰는 뉴욕 마라톤에서 '세계 종말의 쇼'를 발견한다. 그는 뉴욕 마라톤이 "아무런 중요성이 없는 위업에 의해 야기되는 기쁨을 향한 마니아의 일종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라톤은 시위적인 자살, 즉 광고로서의 자살의 형식이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은 달리기이다. 무엇을 증명하는가? 당신이 끝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하는가? 허약함의 이상한 기호, 끝없이 자명한 얼굴 없는 수행에 대한 새로운 열광의 전조."1)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와 닿지 않는 사람들은 정준영의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읽는 게 좋다. 이 책은 보드리야르의 주장을 잘 해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저자 나름의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해설부터 들어보자.
"마라톤, 특히 시민 마라톤은 각자가 '혼자서, 심지어 승리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달리는 것이다. 즉 마라톤은 스포츠가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호소력인 경쟁의 요소를 별로 지니고 있지 않다. 마라톤에서 굳이 승부의 요소를 찾는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이 세워놓은 목표 기록과 그것을 달성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신과의 승부일 뿐이다. 따라서 보드리야르는 마라톤의 매력을 '순수하고 텅 빈 형태, 경쟁과 노력과 성공의 프로메테우스적 황홀경을 대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에서 찾는다. …… 마라톤 참가자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골인 지점의 잔디밭 위로 무너지면서 '나는 해냈다!'라고 한숨짓는 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뿐이다. 그리고 마라톤 참가자는 그 순간 자신이 '더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그 짧은 순간의 기쁨을 위해 참여자들은 3시간여의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이다."2)
1998년과 1999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제7회와 제8회 모토롤라 오스틴 마라톤을 직접 뛴 경험이 있는 저자는 1970년대의 미국 사회, 그리고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를 휩쓴 마라톤 열풍의 사회학적 의미를 중산층 이데올로기와 연결시킨다. 그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호황에 힘입어 소득이 증가한 덕분에 여가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했으며,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가 지적했듯이, 1960년대 사회개혁 운동의 쇠퇴로 1970년대에 사회 구제에서 개인 구제로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사람들은 정치에서 관심을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데 몰두하게 되었으며 이처럼 거의 집착적인 자기중심성에서 '육체의 완성'에 대한 요구가 출현했다는 것이다.3)
미국에서 대중 마라톤 전성기엔 중산층은 4시 이후 공원으로 쏟아져 나와 달리기에 몰두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호사였다. 정준영은 "외적으로 너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과시는 도덕성을 강조하는 중산층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라톤은 이러한 모순을 성공적으로 해소한다. 달리기는 과시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매우 세련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시라는 것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간편한 옷차림과 운동화만을 갖추고 달리는 사람의 모습에는 그의 지위를 드러내줄 아무런 외적 표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지니고 있는 과시의 수단은 오직 달리기라는, 외견상 중립적인 수단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과시할 수 있는데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달린다는 행위 자체이고 이와 함께 그가 과시하는 몸매도 그 수단이 된다. 흔히 우리가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율배반, 즉 열심히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굳이 달리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인 반면 정작 달리기를 해야 할 사람은 전혀 달리지 않는 상황이 이와 관련 있다. 여기서 몸매는 부르디외가 지적하는 매너의 차이처럼 달리는 사람, 즉 중산층이 오랫동안 자신을 통제해온 존재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는 것이다. 결국 마라톤 또는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과시적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산층은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통제된 생활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4)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건 1992년이었고, 이봉주가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딴 건 1996년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대중 마라톤 붐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자는 미국에서 대중 마라톤이 확산된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1997년부터 시작된 IMF 환란에서 마라톤의 대중적 확산을 설명할 근거를 찾는다. 1980년대가 중산층이 사회 전반의 민주화 과정에서 상대적인 진보성을 보여준 시기라면, 1990년대 말은 급격한 경제 혼란으로 인해 보수성을 싹틔울 적절한 기반이 조성된 시기라는 것이다.5)
듣고 보니 그렇다. 마라톤은 금연과 비슷하다. 흡연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견해는 흡연자의 자기통제력에 대한 경멸이다. 그렇게 자기통제력이 약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기통제력보다 더 무서운 건 적(敵)을 전제로 한 독한 전투성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설가 이문열의 금연이다. 이문열은 자신의 책 장례식이 벌어진 뒤 담배를 딱 끊었다고 한다. "내가 쓰러지면 가장 좋아할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담배를 끊게 됐다"는 것이다."6)
엄격한 자기통제력에서 쾌감과 더불어 긍지를 느끼는 게 전형적인 중산층 윤리다. 왜 그렇게 뛰세요? 각자 답은 다르지만, 거의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건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자기통제력의 재미라고 하는 게 그걸 잘 말해준다. 마라톤 마니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마라톤용품의 고급화 현상도 흥미롭다. 선수들만 알아보는 '명품'들이 많다. 그러니 보통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리도 없다. 인생은 흔히 마라톤에 비유되지만, 아무나 마라톤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강준만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9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
---------| 주 |------- 1)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주은우 역, 『아메리카』, 문예마당, 1994, 64∼65쪽. 2) 정준영,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책세상, 2003, 160쪽. 3) 정준영,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책세상, 2003, 164쪽. 4) 정준영,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책세상, 2003, 169∼170쪽. 5) 정준영,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책세상, 2003, 171∼172쪽. 6) 박해현, 「<동서남북> 석면 공포보다 더 무서운 담배」, 『조선일보』, 2009년 4월 8일.
2009/06/18 [10:33] ⓒ인물과사상
강준만 교수는 시국의 하수상함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생뚱맞은 주제로 글을 "잘" 쓴다.
어떻게 보면, 이런 그의 생뚱맞은 글쓰기 때문에 내가 [인물과 사상] 정기구독을 중단한 것 같기도 하다.
"마라톤에는 중산층의 과시, 도덕적 우월감과 같은 이데올로기 요소가 숨어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앞으론 마라톤 뛰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질하면서 "아~ 중산층~!" 이러라고?
인물과 사상에 실린 이 꼭지가 "강준만의 책 읽기"인가, "강준만의 칼럼방"인가? 애매하고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