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유인촌의 재산헌납 약속? 개인의 자율을 존중하는 것이 진보 09.07.08 09:51 ㅣ최종 업데이트 09.07.08 09:53 진중권 (angelus)
MB가 재산을 헌납했다고 한다. 애초에 헌납을 약속한 동기, 약속 이행을 선택한 시점에는 개운하지 못한 맛이 남지만, 아무튼 약속을 지킨 것만은 평가해줄 만하다. 재단에 자기 호를 붙이고, 아는 이들로 이사 삼는 데에서는 끝까지 놓을 수 없는 어떤 애착이 읽혀지나, 이해할 만한 일이다. 즉시 헌납하겠다고 해놓고 300억의 행방을 결정하는 데에 무려 1년 반. 반면, 22조의 나랏돈의 행방을 결정하는 데에 단 몇 달. MB에게 이르노니, 제발
'나랏돈 보기를 네 돈 같이 하라.'
▲ 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 사진은 2일 오전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기자실에서 열린 '2009년 문화부 상반기 주요 성과 및 향후 추진과제 발표' 기자회견. ⓒ 권우성 유인촌
MB의 재산헌납 불똥이 졸지에 유인촌 문화부 장관에게 튀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채택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남이 형성한 재산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실은 좋은 매너가 아니다. 유인촌 장관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해도, 그 형성 과정이 정당했다면 절대로 문제 삼을 수 없다. 문제 삼아서도 안 된다. 정당한 방법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면, 그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 외려 그 능력을 인정해 줄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장관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그에게 재산헌납의 의사를 물은 것은 좀 치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막 장관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에게 '재산 헌납할 의사가 없냐?'고 물으면, 거기다 대고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돌아가는 TV 카메라 앞에서 "없는데요", 이럴 수는 없잖은가. 그것은 똥 마려워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의 앞을 턱 가로 막고 서서, 화장지 한 통을 10만 원에 사지 않으면 화장실에 들여보내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인물을 검증하는 청문회에서는 별 얘기가 다 나올 수 있다. 그의 재산액이 일개 배우가 형성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이다 보니, 의혹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촌사마가 욘사마는 아니잖은가.'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부의 축적이 워낙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돈이 많다는 것 자체가 의심받을 일이 되는 것이다. 한국 근세사를 반영하는 서글픈 일이다.
재산형성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려면 제대로 된 '사실'을 들고 나와야 한다. 의혹을 입증하는 아무런 사실도 찾지 못했다면, 이미 그것으로 검증은 끝난 일. 아무 근거도 확보하지 못하자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의사가 있느냐?'고 치고 들어가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그런 선례를 만드는 게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생각해 보라. 국민이 부자들의 돈을 헌납 받아서 먹고 사는 거지인가? 아니면 공직이라는 것이 자기가 모은 재산을 모두 털어야 살 수 있는 매직인가?
내가 보기에 유인촌 장관은 재산헌납을 약속한 적이 없다. 청문회에서 "네, 네, 네…" 하고 넘어간 것은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곤란한 질문을 피해간 것에 불과하다. MB의 경우, 자기 입으로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은 지켜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유인촌 장관은 경우가 다르다. 그는 자기 스스로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재산헌납은 자발적으로 해야 값진 것이지,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율의 존중. 그게 진보의 길이다.
유 장관에 대한 재산헌납의 압박에서는 어떤 정치적 공격성이 느껴진다. 촌사마가 MB의 분신사마라서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치사하게 한다고 그'에게' 치사하게 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는 사회가 치사해지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치사한 짓(-1)에 치사한 짓(-)으로 대응하면 사회는 더 치사해질(-2) 뿐이다. 치사한 짓에 치사하게 대응하고 싶은 악마의 유혹이 있다. 그래서 진보가 힘든 것이다. 그것은 외부는 물론 내면의 본능과도 싸워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졸지에 유사 파시즘 체제로 되돌아갔어도, 이 시대착오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일. 인내와 여유를 가져야 한다. MB와 그의 세력이 강해 보이는가? 그래봤자 사람이 모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복수'나 '원한'은 노예의 도덕. 복수는 유치하고, 원한은 제 인격만 왜곡시킨다. 적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길은, 적보다 더 논리적으로 되는 것, 더 윤리적으로 되는 것, 더 미학적으로 되는 것,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이다.
MB가 재산헌납을 재단 설립 형태로 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일순간 분노하기도 했는데,
사실 별로 흥분할 일은 아닌 듯 하다. 남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하든, 사실 신경쓸 일은 아닌 거니까.
게다가, 그가 겨우 그 정도 일로 욕을 먹어서야 되겠는가. 자잘한 일은 넘어가주는 아량도 필요하다.
그나마 MB가 그렇게라도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인 일이라고 판단한 진중권 교수의 의견에 동감한다.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은 있는 인물이었다는, 적어도 소통을 완전 불가능한 인물은 아니라는 반증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