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더불어,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이 떠나가네/ 가장 멋진 기억조차도/ 그 얼굴 중 하나는 시간이 깎아낸 것/ 진열대 죽음의 선반 속을 나는 뒤진다네/ 사랑이 홀로 가버린 토요일 저녁."
프랑스의 가수이자 시인인 레오 페레(L o Ferr , 1916∼1993)의 노래라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Bertrand Vergely)는 『슬픈 날들의 철학』(성귀수 옮김, 개마고원, 2007)에서 이 노래의 의미와 관련, "시간이란 폭력과 죽음의 동의어이다. 시간은 지나가면서 우리를 닳아 없어지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고 말한다.(30∼31쪽)
'시간'도 슬프지만 '고통'도 슬프다.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켜준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이런 취지의 격언이나 명언들이 많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베르졸리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고통 속에 잠재하는 악을 깨닫는다면 고통 때문에 인간이 얼마나 자주 망가지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통을 통해 인간을 발전시키려는 태도는 인간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가장 고리타분하고 전제적이며 앙심 섞인 방법이다. 누구든 인간의 친구가 되고자 한다면 그런 식의 방법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종교를 대상으로 해주고 싶은 얘기이다. 인간을 창조한 신은 결코 인간의 파괴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잘못을 보상케 하거나 인간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통을 추천하는 모든 종교가 간과하는 점이다. 그와 같은 종교는 생명의 신을 피와 보복에 취한 죽음의 신으로 변질시킨다."(91∼92쪽)
물론 고통에 유용한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베르졸리는 고통의 유용성에 대한 사고에 몰두할 때, 우리는 종종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지 자기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진 않는다고 꼬집는다.
"이는 참으로 손쉬운 발상이다. 남을 고통에 맞서도록 떠미는 일은 언제나 쉽다. 반면 자기 자신이 고통의 최전방에 나서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로부터 합리화의 거짓 농간이 시작된다. 그것은 고통을 겪지 않는 자들이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떳떳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한다."(92∼93쪽)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렇게 흥분하시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렇게 반문할 정도로 서두를 일은 아닌 것 같다.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통의 유용성만을 생각하다 보면 한 가지 잊는 게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통을 겪는 것이 단순히 당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까지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거기엔 힘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가 작용한다는 얘기이다. 자유로운 삶은 스스로를 견뎌낸다. 그것은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인생 그 자체를 견뎌내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가치전복이 일어난다. 어느 한 순간 개인이 삶을 지나쳐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것을 살아가는 개인을 거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로써 개인은 힘을 얻고, 찬란한 지혜의 빛을 발하게 된다. ……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종종 고통이 부재하는 상태로 상상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 정반대이다. 견뎌낸다는 의미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93∼94쪽)
이걸 읽는 순간 "앗, 낚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고통의 유용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고통을 겪는 것이 견뎌내는 것까지 의미한다고 전제하지 않을까? 뭔가 좀 색다른 이야기인줄 알고 따라 갔더니, 뻔한 말씀을 하신다. 나름대로 튼튼한 방어막이 구축됐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후엔 아예 노골적인 '고통 예찬론'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가급적 고통 없이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후회'에 관한 글은 깊이가 있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말이다. 저자는 "우리는 종종 후회를 말해야 할 자리에 미련이란 단어를 쓴다. 그 때문에 후회와 미련을 가끔 혼동하기도 한다. 그 혼동의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도둑들은 자신들이 도둑임을 밝힘으로써 그 사실을 상쇄할 만한 정직성을 과시한다고 믿는다. 말로 행위를 잊게 만들려고 성실한 고백을 농락하는 셈이다. 위선적인 용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후회를 통해 악행을 변모시킨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을 용납하게 만들기 위해 세 치 혀의 마법에 기대는 전략일 뿐이다. 그런 뜻에서, 용서하는 것이나 용서를 받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에는 상당한 건강함이 깃들어 있다."(152∼153쪽)
'끈기'는 어떻게 볼 것인가? 니체(Nietzsche, 1844∼1900)는 "감정의 세기는 그 활발함이 아닌 지속성으로 측정해야만 한다"고 했다. 베르줄리는 이 말을 받아 "사랑이 그 좋은 예이다. 처음 사랑에 빠지기는 쉽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불붙는 것이 아닌 불꽃을 계속 살아 있게 하기를 요구한다. 그를 위해서는 일종의 변화가 따라주어야 한다.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옮겨가야만 하는 것이다. 받는 것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베풀고, 창안하고,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281쪽)
참으로 좋은 말씀이다. 저자는 무언가에 열심히 매달리는 걸 '인위적인 끈기'라고 부르면서 끈기를 삶의 열림을 유지하는 것으로 재정의한다. 큰 성공을 해놓고도 바로 이런 끈기가 없어서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끈기 있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이긴 자가 되기 위해 그저 이기는 것으론 충분치 못하다. 성공은 더 이상 성공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공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첫 번째가 된다면, 설사 성공을 거두더라도 모든 걸 실패할 수가 있다. 그런 인생은 삶이 아닌 죽음에 속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성공이 곧 실패인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286∼287쪽)
가슴에 팍 와 닿는 말씀이지만, 성공에 미쳐 돌아가는 우리 세태에서 성공이 곧 실패인 경우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원리도 성공학 처세술의 일환으로 쓰이는 세상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만 아픔을 피해가는 삶은 가능하지 않기에 성숙의 정체가 무엇이건 우리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되뇔 수밖엔 없으리라.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이 떠나간다는데, 아픔부터 떠나가도록 빌어보는 게 어떨까?
"시간과 더불어,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이 떠나가네/ 가장 멋진 기억조차도/ 그 얼굴 중 하나는 시간이 깎아낸 것/ 진열대 죽음의 선반 속을 나는 뒤진다네/ 사랑이 홀로 가버린 토요일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