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소식을 들을 때 느끼는 것은 일종의 ‘기시감’이다. 방송사 “좌파 청소”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전직 교수(!)를 보거나, 정권과의 유착에 대한 강한 의혹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 종단의 지도자를 보거나, 옛날에 이미 본 듯한 느낌이다. 지배자의 충신이 되는 데에 스스로 자긍심을 내비치는 ‘지식인’, ‘반공’이나 ‘호국’의 기치를 내걸어 지배자들과 어울리는 종교인…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일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일상’과 질적으로 다른 ‘사건’ 하나에 최근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고려대 여학생이 영혼이 없어진 대학을 자퇴 내지 거부하기로 한 일이었다. 이 결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단순히 기업화되어가는 대학의 타락과 이 타락을 부추기는 ‘기업형 국가’의 문제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인간이 왜 사는가, 우리가 인생들에 부여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이 여학생을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취업학원’이 돼버린 대학을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한다. ‘취업’이란 무엇인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다수의 무산자들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 소유자들에게 파는 방법, 즉 생존의 방법이다. 동물이면 단순한 생존 이상을 구하지 않겠지만,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에게 생존 이상의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데에 있다. 만족스러운 인생의 필수조건은 생존이겠지만, 충분조건은 자아실현, 즉 자기만의 꿈을 가꾸는 것이다. 어르신들을 도와주는 사회복지사가 되려는 꿈이든, 모든 이들에게 ‘소리’를 통해 기쁨을 주는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꿈이든, 무슨 일을 해도 늘 여유를 두고 역사책을 읽는 인문학 애호가가 되려는 꿈이든, 꿈이 없는 인생은 곧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 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어느 정도 복지국가의 기틀이 잡힌 사회에서는, 대학이란 꿈을 찾으러 오는 곳으로 인식된다. 4년 전에 필자가 재직하는 대학의 중국학 전공 학생 150명에게 물어본 결과 전공을 선택했을 때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나 취업 가능성을 생각한 이는 3∼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그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중국과의 “만남”을 원해서 왔다고 응답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공부관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사회복지사를 꿈꾸어도 사회복지사의 59%가 비정규직으로 고생한다는 현실 앞에서 졸업 후에 비정규직으로 전락해 등록금 대출금을 갚을 능력도 없지 않을까 겁이 나고, 개인레슨의 천문학적 비용과 음악인 취업시장의 포화상태로 집안이 부유하지 않은 한 음악인이 되려는 꿈을 애당초부터 접고, 아르바이트와 ‘스펙’ 쌓기에 정신없어 인문서를 읽는 걸 ‘사치’라고 여기게 되고…. 사회에 의해서 제어되지 않는 시장의 지배하에 사는 이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영원히 불안해서 꿈까지 생각할 심적인 여유가 생길 리 없다. 그저 ‘빵’을 위해 앞만 보고 계속 달려야 할 뿐이다. 기업형 국가, 기업형 대학의 현실에서는 우리는 꿈을 빼앗긴 채 하루하루 단순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해야 하는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동물농장이 된 대학을 탈출해 ‘인간’으로서의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것은 이번 ‘대학 거부 사태’의 본질이 아니었는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 사회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본면목을 되찾기 힘든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으로 올바른 진단이고, 답답한 현실이다.
대학이 이미 대학이 아닌 사회.
이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일까?
어릴 때부터 기를 쓰고 사교육에 밖으로만 내둘려 키워 어렵게 어렵게 대학을 보내봤자 취업준비생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