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딱 한 세기 전,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제는 국내 ‘분위기 제압’ 차원에서 고토쿠 슈수이(幸德 秋水, 1871~1911)를 위시한 몇 명의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무더기로 체포하여 그들에게 “천황 암살 기도”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덮어씌웠다. 안중근 의사를 너무나 존경한다고 공언했던 고토쿠는 일제의 대외팽창 정책을 반대하는 측면에서도 눈엣가시였지만 무엇보다도 그와 그의 동지들이 노동자들을 이끌어 대중적 저항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은 당국으로서 두려웠다. 검사들이 고토쿠에게 “폭력주의”와 “암살주의”를 애써 덮어씌웠지만, 그는 명문(名文)으로 평가되는 그 <진변서>(진술서)에서 그가 주장한 “혁명”과 “폭력”이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혁명의 목적이 사회관계의 근본, 예컨대 과잉투자와 이윤율 저하, 공황을 배태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생산시설에 대한 사유제도를 본질적으로 바꾸는 것이지 폭력 행사가 아닌 것이며, 폭력이 없는 혁명이야말로 이상적이다라는 것은 그 논리의 핵심이었다. 물론 고토쿠가 혁명운동보다 기존 체제가 훨씬 더 폭력적이라는 걸 아무리 증빙해도 소용없었다. 사형판결은 이미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일제의 이와 같은 진보인사 탄압을, 우리가 통상 “만행”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지 65년 만에, 일제의 만행들을 비판하는 데에 늘 앞장서는 대한민국에서는 “대역(大逆)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고토쿠와 그 동지들에 대한 재판과 유형적으로 흡사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이라는 좌파 단체를 만든 오세철 명예교수(연세대) 등 활동가 몇 명이 “체제변란 기도”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사상 재판”이라는 일제시대의 악습을 끝내 버리려 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지난 6월23일에 열린 공판에서는 피의자들과 피소 측의 증인으로 나선 진보학자들이 고토쿠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혁명”과 “폭력”이 전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합법적 정치활동의 범위에 든다는 점을, 그리고 사노련이 생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북한의 수령제 독재와 무관하다는 점 등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검찰 측에서 계속해서 “사회주의자라면 자유민주주의를 폭력적으로 부정하는 활동이 아니냐”고 반문하곤 했다. 고토쿠 재판에서처럼, 폭력이 아닌 변혁을 모색하는 사람들을 “폭력자”로 몰아세우는 행태다. 아직도 국내에서 출판조차 되지 못했던 고토쿠의 <진변서>를 읽지 못해 동아시아 근대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탓인가?
요즘 국내 보수인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선진화”인 셈이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선진국”을 봐도,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면서 사회 일각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프랑스에서는 2007년 총선에서 사노련과 흡사한 주장을 내놓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과 노동자 투쟁 그룹, 급진적 좌파당 등이 다 합쳐서 5%를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노르웨이에서 대기업의 사회화와 미국과의 군사동맹의 파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좌파당이 고정적으로 5~7%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지금 좌파 연립 내각에 입각돼 있지 않은가?
“선진성”이란 결국 타인에게 실제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걸 뜻할 뿐이다. 경영자의 “무노조 방침”과 무관하게 노조를 결성할 자유일 수도 있고, 경찰들에게 탄압을 받지 않고 집회를 할 자유일 수도 있고,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멍들게 하는 무의미한 시험들을 거부할 자유일 수도 있고, 군에 가서 살인교육을 받는 일을 거부할 자유일 수도 있고, 급진적 사상을 탐구하면서 활동할 자유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자유들이 부재하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다. 보수적 관료와 재벌들이 운영하는 커다란 착취공장일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얼마 전, EBS 강사가 군대에 관해 경솔한 발언을 했다가 퇴출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발언 자체는 너무나도 사실적인 내용 아닌가?
군대에서 그럼, 죽이는 걸 배우지 살리는 걸 배우나? 총쏘면 살아나나?
나라를 지키는 것? 형이상학적인 의미 놀음은 딴데가서 하고, 현실적으로, 실제로 배우는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