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이해가 가지 않는 <명량> 열풍
2014.09.16 13:52
영화 <명량>의 열풍이 대단합니다. 개봉 36일 만에 누적관객수 1700만명을 돌파하더니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10일까지 1742만8122명을 기록했습니다. 매출액 1300억원도 한국영화 사상 최고입니다. 말 그대로 ‘초대박’을 터뜨렸습니다. <명량>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 이야기입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수백척의 적선을 맞아 12척의 배를 갖고 싸우러 나가고,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死卽生 生卽死’(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며 임전무퇴의 기개를 보여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 바로 이순신 장군 이야기에 온 나라가 감동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과 리더십이 재조명됐고, 추앙받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도 앞다퉈 명량을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합니다. 이순신 열풍은 뜨거운데 이순신 정신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순신 열풍은 영화관에서 두 시간 동안만 유효합니다. 영화관 안에서만 한바탕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어서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언제 바람이 불었나 싶게 잠잠합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은 현실대로 흘러갑니다. 여기에 기묘한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입니다. 이순신 열풍 뒤편에서 나라를 바쳐 목숨과 재산을 지킨 친일파들이, 그 후손들이 득세하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대통령도 되고, 총리도 되고, 장관도 되고, 사회 지도층으로 위세를 부리는 그런 나라입니다.
광복군의 후손이 정치인이 되고,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되고,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대신 익숙한 게 있습니다. 틈만 나면 벌어지는 고위 공직자 후보자들의 친일 논쟁입니다.
얼마 전 친일사관이 논란이 되면서 낙마한 문창극 총리 후보자도 그랬고, 이인호 KBS 신임 이사장도 그렇습니다. 이인호 이사장의 조부인 이명세는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 704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친일파입니다. 조부가 친일파라도 후손이 반성하고 참회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인호 이사장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요된 일로 두 세대 전에 태어났다면 나도 친일파 명단에 올랐을 것” “서구에 맞서 유림을 키우기 위한 일”이라는 등의 궤변으로 조부의 친일행각을 옹호합니다. 연좌제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조부의 친일 행각을 반성하지 않고 옹호하는 후손들이라면 친일파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박효종 방송통신심의위원장도,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도, 권희영 한국학대학원장,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도 친일·독재를 미화한 뉴라이트 계열 인물들입니다. 아마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가 살아 있다면 이들에게 폭탄을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폭탄을 맞는 대신 고위직에 올라 떵떵거리며 권력과 위세를 뽐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명량의 열풍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 영웅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표출되는 것이란 해석도 있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선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에 열광하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영화관 밖으로만 나오면 눈을 감습니다. 친일 인사들이 활개치고 다녀도 모른 척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를 좌우명처럼 외고 다닌다는 군인사들이 전시작전권을 미군에 바치지 못해 안달합니다. 현해탄보다도 넓은 이 현실과 감정의 괴리. 영화관에선 열광하고, 현실로 돌아오면 외면하는 이중인격을 지녀야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 이중구조에서 기득권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환호작약하고 있는 건지도. 이순신 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한심한 후손들이라고.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