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는 아무리 봐도 참 분석을 잘 한다. 오바마에 대해서도 그렇고 노무현에 대해서도 그렇다.
강준만 교수가 이명박에 대해 분석하는 글을 최근엔 잘 볼 수 없다. 전혀 기대조차 걸고 있지 않는 인물을 언급할 말 한마디도 아까울 것 같다. 그래도 시간내서 좀 씹어줬으면 하는 생각도 어렴풋이 든다.
아무튼, "화합 브랜드를 가진 감성의 정치인"을 기다려보자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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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inmul.co.kr/xroz/sub_read.html?uid=2169§ion=section1
오바마가 한국 정치권에 던진 '참 메시지': 왜 한국 정치는 ‘화합’으로 갈 수 없는가?
강준만
'냉소의 정치'와 '희망의 정치'
"리버럴 아메리카도 없고 보수 아메리카도 없습니다. 아메리카 합중국(合衆國)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 아메리카도 없고 백인 아메리카도 없고 라틴아메리카도 없고 아시안 아메리카도 없습니다. 아메리카 합중국이 있을 뿐입니다. …… 우리는 냉소의 정치에 참여해야 할까요, 아니면 희망의 정치에 참여해야 할까요?"1)
미국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 민주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1961∼)가 2004년 7월 27일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 자리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John Forbes Kerry, 1943∼)의 출정식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연설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행운이었지만, 더 큰 행운이 오바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16분짜리 연설 하나로 무명의 오바마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타임』은 '녹아웃(KO) 연설'이라고 격찬했는데, 실제로 그의 연설은 많은 유권자들을 녹아웃시켰다. 그는 그 덕분에 상원의원에 가볍게 당선되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그로부터 불과 4년 4개월 만에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선 기간 중 오바마가 내세운 화합의 메시지엔 명암(明暗)이 있었다. 그걸 반기는 이들도 많았지만 분노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가장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 흑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인 제시 잭슨(Jesse Jackson, 1941∼) 목사는 2008년 6월 "버락이 흑인들을 폄훼하고 있다"며 "그의 그곳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가 흑인들에게 연설을 하며 실업률이나 재소자, 부동산 문제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도덕적 문제만 언급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며 그렇게 비난한 것이다.2)
나중에 잭슨은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에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지만, 오바마가 잭슨의 주장대로 했더라면 대통령에 당선될 순 없었을 것이다. 잭슨의 문제제기를 어떻게 평가하건 오바마가 미국인들이 느끼는 피로 현상의 핵심을 건드린 건 분명하다. 오바마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선 그 무엇을 기대하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고든 셈이다.
오바마의 '화합 프레임'
오바마는 승리가 확정된 2008년 11월 4일 밤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의 그랜트 파크에 운집한 24만여 지지자들 앞에서 "미국에 변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라는 걸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의 꿈이 우리 시대에도 살아 있다는 걸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힘을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밤이 바로 그런 의심에 대한 답입니다."3)
오바마는 다시 화합을 역설했다. 그는 "우리 정치를 그토록 오랫동안 망쳐온 당파주의와 협소함으로 다시 빠져들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공화당은 자립과 개인의 자유, 국가의 단결을 가치로 세워진 정당이며 그런 가치는 우리 민주당도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갈라져 있던 시절 링컨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이 나라에서 우리는 한 몸으로 뜨고 진다"고 했다. 오바마는 "우리의 답변(선거 결과)은 청년과 노인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계와 아메리카 원주민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를 분열시키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라면서 화합의 기운을 미국 밖으로도 전파시키겠다고 했다.4)
뛰어난 연설꾼인 오바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미국이 대통령 하나로 바뀔 수 있는 나라냐. 그는 곧 보수 기득권 세력의 품안에서 놀게 될 것이다"라고 냉소의 시각을 보내는 이들이 많거니와 그런 냉소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거의 모든 이들이 불가능한 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다.
미국 『타임』 칼럼니스트 조 클라인(Joe Klein, 1946∼)은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과 관련, "오바마가 금융위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실의 반만 말한 것이다. 오바마는 신중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라고 했다.5) 이 또한 진실의 전부는 아니리라. '화합'이라고 하는 오바마의 프레임을 빼놓곤 그의 승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화합은 감성의 축제
『동아일보』 논설주간 배인준은 「오바마가 한국 정치권에 던진 '참 메시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오바마의 승리는 국민통합에 대한 일관된 신념, 그리고 행동으로 입증한 진정성의 산물이라고 할 만하다. 분열 아닌 통합, 냉소 아닌 희망이야말로 미국과 세계가 위기를 돌파할 에너지임을 미국 유권자들이 공감한 결과다"라고 했다.6)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오바마가 '뛰어난 마키아벨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동물적인 정치 감각에 능하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국민통합과 화합은 오바마의 경쟁자인 존 메케인(John S. McCain, 1936∼)이 쓸 수 있는 프레임은 아니었다. 그건 오직 흑인인 오바마만이 쓸 수 있는 카드였다.
오바마는 제시 잭슨이 지적한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도덕적 문제만 언급하는 오류'를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삼은 셈이다. 이게 바로 오바마의 꾀다. 진실은 잭슨의 편이지만, 정치는 진실 게임이 아니다. 백인들이 불편해하는 지점을 포착하고 그것을 포용하지 않는 한 흑인 대통령의 탄생은 불가능하다는 걸 오바마는 꿰뚫어 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진짜 흑인들은 알 수 없는, 오바마와 같은 혼혈인만이 알 수 있는 각성이자 지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서전에서 "흑과 백의 두 세상에서 줄을 타는 법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던가.7) 제시 잭슨은 원초적으로 결코 넘볼 수 없는 경지였으리라.
민주당 경선에서도 선거의 교과서적 원칙에 따르자면, 오바마보다는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Hilary Rodham, 1947∼)이 진실의 편에 더 가까이 있었다. 무엇이 옳건 그르건 힐러리는 명백한 이슈와 정책을 말한 반면, 오바마는 '레토릭'의 대성찬만 벌였을 뿐이다. 오바마는 뉴햄프셔 연설에선 마지막 3분 동안 "우리는 ∼을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12회나 반복하는 등 시종일관 레토릭의 마술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8)
그러나 이게 오바마가 빈껍데기라는 걸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늘날의 미국에 필요한 건 '이성'보다는 '감성'이며, 화합은 감성의 축제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가 한국에 주는 교훈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의 응징'과 '증오의 정치'
배인준은 "국내로 눈을 돌리면 참 답답하다"며 "지금 우리 정부와 정치권에선 통합, 협력, 상생의 자세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개탄했다. 그는 "분열과 갈등의 중심이 아니라 통합과 화해의 중심이 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인물만이 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라며 "물론 현직 대통령부터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9)
이 또한 취지는 백번 옳은 말씀이긴 한데,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는 건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정치에 대한 언론의 역지사지다. 배인준이 몸담고 있는 동아일보는 '통합, 협력, 상생'의 저널리즘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분열과 갈등' 저널리즘의 원조라 할 조선일보를 능가할 정도로 '분열과 갈등' 저널리즘에 앞장서고 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걸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다. 언론은 정치와 다르지 않느냐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언론이 못하는 걸 정치가 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게 훨씬 더 비현실적이리라. 왜 동아일보가 '통합, 협력, 상생'의 저널리즘을 실천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를 규명하다 보면 왜 정치권이 지금 이 지경인지 그 답도 나올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통합, 협력, 상생'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했는가? 그렇긴 한데,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의 순서를 이렇게 가져가보자. 노 정권이 가장 앞세운 건 '정의'였다. 그 정의의 내용을 어떻게 평가하건 말이다. 정의 실현은 장기적·거시적으론 '통합, 협력, 상생'으로 가는 길일망정 그건 이론일 뿐이며 적어도 정권 임기 중엔 필연적으로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돼 있다. 그것도 정의 실현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기반한 '분열과 갈등'이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노무현이 열성 지지자들에게 정의 실현을 앞세워 그 반대세력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선동하기보다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화합과 봉사를 외쳤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노사모가 반노 세력과의 투쟁에 골몰하는 대신 국내 최대의 자원봉사 전위대로 맹활약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는 데에 헌신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엄청난 변화가 가능했겠지만, 확실한 것만 말하자면 노무현과 노사모가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노무현이나 노사모 탓만 할 수는 없다. 많은 국민들이 '증오의 정치'에 감염돼 있기 때문이다. 밭이 그런 걸 어찌하랴. 물론 본인들은 그런 표현엔 수긍하지 않으리라. '정의의 응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의의 응징'과 '증오의 정치'는 분리 가능한 게 아님에도 자꾸 그걸 분리하려고 드는 심성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단재 신채호(1880∼1936)가 "도덕과 주의(主義)가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是非)에서 났느냐" 하는 질문을 던져놓고,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고 개탄한 것도 바로 그런 심성을 지적한 게 아니고 무엇이랴.10)
'카타르시스'와 '스트레스' 사이에서
이명박 정권 사람들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한 세월을 5년이 아니라 김대중 정권까지 포함한 10년으로 보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을 썼다. 그 10년에 대한 반감과 복수가 동아일보는 물론 이명박 정권의 정체성이다. 아직 못 푼 한(恨)이 많이 쌓여 있다. 이들에게 '통합, 협력, 상생'은 이성 이전에 감성, 아니 본능적으로 거부 대상이다.
이는 근원적으로 보자면,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오랜 세월 정치가 사유화된 가운데 이권투쟁의 도구로 전락해온 탓이기도 하다. 애초에 국리민복(國利民福)이 우선 고려 사항이 아니었으니, 지도자는 물론 지지자들까지 굳이 카타르시스보다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화합에 매달릴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한국엔 미국 유권자들이 느낀 '분열과 갈등'에 대한 피로 현상이 없을까? 없을 리 없다. 오히려 한국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길을 잘못 들었다. '통합, 협력, 상생'이라는 대안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주체에 대한 응징과 보복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게 민주당의 지지부진이다.
많은 논객들이 민주당에 대해 이런저런 주문을 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철저히 비켜가고 있다.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한다느니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라느니 등의 주문이 가장 많은 것 같은데, 그렇게 한다고 민주당의 지지율이 오를까? 아니 그 이전에 그게 가능할까?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정체성 문제로 치열한 내부 투쟁을 벌였지만 답을 내지 못했다. 구성원들의 생각이 각기 다른데 무슨 수로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내세울 수 있으랴. 야성 회복에 대해서도 한 가지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물론 여기엔 인터넷의 축복과 저주가 가세했다. 종합평가를 하자면 인터넷을 통한 대중의 정치참여는 축복에 가깝겠지만, 당면한 문제에 있어선 과도기적으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전투구(泥田鬪狗) 사태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유권자들은 냉소라는 두터운 외투를 걸친 상태다. 부정적 의미로 말하는 냉소가 아니다. 최소한의 자기 보호 메커니즘으로서의 냉소다. 민주당의 부진은 민주당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한국 정치와 공공 영역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이렇게 문제제기가 근본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면 보수세력이 더 재미를 보게 돼 있다.
민주당이 민주당의 문제를 넘어서 대중의 근본적인 정치 불신·혐오와 싸우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카드가 없는 건 아니다. 그건 모든 의원들이 문자 그대로 공복(公僕)처럼 사는 감동 작전을 펼치는 것이지만,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금배지를 단 목적이 무엇인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려고 하겠는가?
이런 상황이 진보정당들에겐 절호의 기회지만, 진보적 의제에 충실해야 한다는 존재 근거가 대중과의 소통에 족쇄가 된다. 오바마식 화합의 메시지도 수사학을 넘어선 구체적 대안으로 입안된다면 해볼 만하지만, 수많은 제시 잭슨들이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한 이상 그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승리가 전부라면서도, 세상은 의외로 승리에 무관심하다.
오바마가 한국 정치권에 던진 '참 메시지'는 '체험적 꾀'다. 미국과 한국의 조건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한국 실정에 맞는 꾀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화합'으로 가기 어렵게 만드는 해묵은 장애물들도 꾀로 돌파해야 하는데, 한국엔 체험적 꾀를 경멸하는 근본주의자들이 너무 많다. 이들이 정치권 안팎에서 개혁·진보세력의 중추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살판난 것이다. 묘한 '적대적 공존'이다.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근본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과 격파가 있을 때에 화합의 터전이 마련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숨 가쁘게 그걸 기다리고 있다. 노무현의 '증오' 브랜드와는 정반대인 '화합' 브랜드를 내세우되 노무현처럼 대중을 무섭게 선동할 수 있는 감성의 정치인은 아직 명함조차 내밀지 않았다. 어디 좀 더 기다려보자.
강준만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9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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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bama, Barack", Current Biography, 66:7(July 2005), p.54.
2) 서수민, 「이번엔 잭슨 목사가… 오바마-흑인 잠재 갈등 부각: "흑인 폄훼… 그곳 자르고 싶다"」, 『한겨레』, 2008년 7월 11일.
3) Nancy Gibbs, "'This Is Our Time'", Time, November 17, 2008, pp.22-27.
4) 김외현, 「오바마 당선 연설 "미국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3면; 이기홍, 「오바마 '중도의 깃발' 드나」, 『동아일보』, 2008년 11월 7일, A1면.
5) Joe Klein, "Passing the Torch", Time, November 17, 2008, p.15.
6) 배인준, 「오바마가 한국 정치권에 던진 '참 메시지'」, 『동아일보』, 2008년 11월 18일, A30면.
7) 김순배, 「미국 오바마시대 개막: 흑-백 사이 '슬픈 줄타기' 넘어 '코즈모폴리턴' 우뚝」,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5면.
8) 최을영, 「인물 포커스: 버락 오바마」,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12월, 59쪽.
9) 배인준, 「오바마가 한국 정치권에 던진 '참 메시지'」, 『동아일보』, 2008년 11월 18일, A30면.
10) 하우봉, 「새로운 시각에서 쓴 한국 유교사: 옮긴이의 말」, 강재언, 하우봉 옮김,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3, 501∼502쪽.
2008/12/18 [14:55] ⓒ인물과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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