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스포와 실천

낙서장 2013. 12. 29. 16:16

여러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아친다. 특이한 증세.

이럴 때는 간략하나마 "말"로 두 번 세 번 고쳐 쓰며 정리해버려야 다시 머리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1. 영화, 드라마. 스포.


난 스포를 좋아한다. 미리 결말을 알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밌다. 책이든 영화든 한번 빠져들면 주변에서 무슨 소릴 해도 못 듣는 스타일이라 메인 스토리 흐름에 집중하느라 놓치는 주변 인물이나 배경 등의 디테일이 많다.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와 정말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건 미리 다 알고 볼 때 혹은 이미 봤던 거 다시 볼 때뿐. "절름발이"(유주얼 서스펙트) 식의 뜬금없는 반전이나 "남편은 누구?"(응답하라 1994) 같은 억지 호기심 유발 스토리는 썩 불쾌하다. 작가나 연출자에게 시종일관 농락당하는 기분.


언젠가부터 단기 기억력이 몹시 저하돼 봤던 영화나 봤던 책도 채 하루도 가기 전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용은커녕 봤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일이 잦은데,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명작은 열 번도 넘게 봤다. 뻔한 걸 뭣하러 자꾸 보나 싶겠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놀랐고 당황했고 기뻤다. 화면과 음악의 절묘한 조화는 아~ 정말 예술의 경지! 나중에는 OST만 들어도 화면이 저절로 눈앞에 펼쳐졌다. 단언컨대, 그런 영화 거의 없다. 십여 회 보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서야 더 안 보게 됐다.


어제 밤에 [박하사탕]을 다시 봤다. 설경구의 절룩거리는 다리를 통한 미묘한 심리묘사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김여진 문소리도 참 앳된 나이였구나 싶고. 뭔가 말을 하다 만 듯한 2% 부족한 완성도는 여전히 아쉬웠고.




2. 일베와 국가댓글원. 오프라인. 실천.


옛날에는 외치고 쓰는 사람들은 많이 배워 이른바 "의식화"된 사람이거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대중들은 아주 가끔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정도였지 대부분 외면하거나 무반응이었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남의 일", "많이 배운 것들이 뜨신 밥 묵고 쉰 소리 내는 일"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생활의 평온이 무너지는 심력 낭비라 여겼을 테고, 또는 그런 "소수"가 외치고 써봐야 뭐가 얼마나 바뀔까 하는 안이한 생각도 있었을 테다.


그래서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해 사회가 변화하고 움직여갈 수 있었다. 그래봤자 거대한 반동의 바퀴가 가속 회전하는 것을 아주 조금 방해하는 정도뿐이긴 했지만.


요즘은 말 그대로 개나 소나 다 외치고, 쓰고, 딴죽을 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일베뿐만 아니라 "의식화"되지 않은, 아니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거꾸로 의식화(반동화)"된 초·중딩 수준의 시사·사회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떼지어 사이버 공간을 몰려 다니면서 딱 제 수준에 맞는 욕설과 막말, 몰상식, 비도덕, 패륜 등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것들을 뒷간에 똥 싸듯 쏟아내며 포털이며 언론사, SNS, 주요 커뮤니티 등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다닌다. 그에 반해 많이 배운 "의식화"된 사람들은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하며 그들의 공세를 계속 피해 다니다 스스로를 점점 좁은 폐쇄 동아리 안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한 때 인터넷 공간에서 유행하던 "사이버 전사", "키보드 워리어"는 심력만 낭비하는 무의미한 삽질 이라는 비아냥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가 되고 말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런 "남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불필요한 심력 낭비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아니, 그건 예전 그대로인건가?) 그런 "인간쓰레기"들이 설쳐봐야 뭐가 얼마나 바뀔까 하는 안이한 생각도 물론 있었을 테고.


이제 세상은 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위로는 정치권에서부터 국가기관, 제도권 언론(거기다 요즘은 "종편"까지), 보수단체들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 그들은 눈과 손가락으로만 외치고 쓸 뿐이라는 점이다. 기껏해야 자기 자신의 추악함과 비루함을 익명 댓글, 혹은 "인증샷"이라는 일탈 행위로만 드러낼 수 있을 뿐 오프라인이 되면 아무런 사회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온라인이 끊어지는 시점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예전 "일반 대중"으로 돌아간다. 무슨무슨 연합, 무슨무슨 동지회 같은 언론플레이를 위한 이름뿐인 단체 플랭카드를 걸어놓고 "불쑈"를 하는 것이 그들의 거의 유일한 행동.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무엇이 필요할까?


질문에 이미 답이 있지만, 굳이 언급해 보자면,

한 편으로는 예전과 같은 열혈 키보드 워리어들도 다시 많아질 필요가 있을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프라인 활동을 키우고 확장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즉, 오프라인 커뮤니티 - 토론, 세미나, 집회, 시위 - 를 복원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그게 가능한 것이었다면, 과연 지금 이런 상황이 왜 됐을까......?




Posted by 떼르미
,


자바스크립트를 허용해주세요!
Please Enable JavaScript![ Enable JavaScrip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