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4월 30] '이명박 혁명'을 위하여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 미국의 비판적 지성 노암 촘스키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그런 여유가 부럽다. 단지 쓸쓸해질 뿐이라니 말이다. ‘머슴’이 되겠다고 나선 분들의 재산을 까봤더니 웬 부동산이 그리도 많은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제를 밀어붙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거 하나만큼은 위대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다가도 오히려 원망스러워질 때가 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어디에

 

“그는 시골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실은 그가 시골이 가장 좋아지는 것은 도시에서 시골에 관해 배우고 있을 때이다.”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한국에선 이렇게 바꾸는 게 어울릴 것 같다. “그는 시골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실은 그가 시골이 가장 좋아지는 것은 서울에서 시골 땅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뒤에 냉철한 판단 과정을 거쳐 땅을 사고 후속 관리를 할 때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렇게 하기가 쉬운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부지런해야 한다. 현명한 판단을 위해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마음 고생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해야 한다. 때론 법과 도덕을 조롱할 줄도 알아야 하고 거짓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걸까? 이런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고위 공직을 맡을 때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설마 그렇진 않으리라 믿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혁명’이다. ‘의식혁명’이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없다. 무조건 이윤만 남기면 된다”는 의식의 대전환을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혁명’ 이다.

그 혁명은 ‘언어혁명’이기도 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들을 강제 결혼시키는 ‘부조화 혁명’이다.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머슴’이라고 부르질 않나, 실용주의의 바탕인 청교도주의는 외면하면서 스스로 ‘실용주의’를 외쳐대는 식의 혁명이다. “청와대가 부자들만 모인 곳이라는 인상을 줬다”느니 “자아를 관리할 수 있어야 청와대 들어올 자격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인사권이 대통령이 아니라 야당 대표에게 있다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이명박 혁명’의 동력은 반감(反感)이다. 열성 지지자들만 바라본 노무현의 ‘마니아 운동 정치’, 그리고 그걸 견제하지 못한 채 내내 끌려 다니는 보신과 무능으로 일관하다가 막판에 어설픈 ‘쇼’를 벌인 구 여권 세력의 기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먹고 사는 혁명이다. 그 반감의 약효가 떨어질 때에 혁명의 불꽃도 사그라들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실패는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이 나라가 ‘편 가르기’와 ‘승자 독식주의’로 일관하다간 정말이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만다.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부자 머슴’들은 건재하겠지만, 늘 당장 죽어나는 건 서민들이다.

 

‘반감의 정치’ 끝내는 게 과제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허영심을 관리하는 것이다. 자신의 ‘코리언 드림’ 성취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행운이 가져다 준 걸로 이해하는 슬기가 필요하다. 겸허해져야 한다. 자신의 인생은 두뇌 노력 인내 오기 도박으로 대박을 터뜨렸을망정 국정 운영은 그렇게 안 된다.

대화를 해야 한다. 상대편에게 “너 과거에 어떻게 했어?”라고 따져 묻기 시작하면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옆에서 “잘 한다”고 박수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그걸 ‘코드’로 착각하면 재앙이다. 이명박은 노무현을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 만인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이명박 혁명’은 ‘반감의 정치’를 끝장내는 것이어야 한다.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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