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강준만 칼럼/7월 9일] '중간'이 없는 이유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금 우리 사회는 중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영성 한국일보 부국장 겸 정치부장이 7월 2일자에 쓴 ‘지성의 붕괴, 중도의 붕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이 개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 그럴까?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떡 이론’으로 한 번 풀어보자.
승자 독식주의 체제 하에선 중간파가 먹거나 제공할 수 있는 떡이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중간파가 떡 보고 중간을 택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해된다면 가장 큰 도덕적 우위를 누려야 되는 게 아닌가? 얼른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만 그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세상사의 묘미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승자 독식판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보통사람들이 무슨 떡을 바라보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사람들의 주장은 순수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소외의 공포’도 순수인가? 소외 당하고 있다는 느낌만큼 기분 나쁘고 두려운 건 없다. 그래서 누구건 가급적 ‘주류’에 끼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비주류나 반주류도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갖기 때문에 그 속에서 다시 주류가 되고자 하는 투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선두의 지지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일컫는 ‘밴드왜건 효과’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 ‘밴드왜건 효과’에서 비롯됐다는 걸 인정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러니 개인의 순수성을 판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선거란 무엇인가? 그건 헌법이 보장하고 국가가 공인해 주는 승자 독식의 도박 축제다. 선거 시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승자는 다음 선거에서 또 이기기 위해 승리한 그 날부터 다시 선거 체제에 돌입한다. 패자도 마찬가지다. 선거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의 본질도 도박이라는 건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승자 독식체제 하의 경쟁세력들은 각자 방대한 먹이사슬 체계를 갖고 있다. 그 체계의 말단이 각 지역·동네마다 존재하는 이른바 ‘여론 선도층’이다. 정치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 대중도 이 여론 선도층의 자장(磁場) 안에 들어가 있다. 우리가 흔히 개탄하곤 하는 지역주의 선거도 바로 이런 자장의 산물이다. 그런 다단계를 거치면서 떡의 존재는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되며, 명분ㆍ이념의 포장을 뒤집어 쓰게 된다.

해방정국에서 중간파가 설 자리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줄 떡이 없고, 피를 끓게 만드는 담론을 생산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급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떡의 공정 분배를 선호하고 피와 열정을 멀리 하는 중간파의 운명은 고독과 고립이다. 오랜 세월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중간파가 ‘기회주의’나 ‘사쿠라’의 오명을 뒤집어 쓴 탓도 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고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지성사회 구성원의 인정욕망 실현이나 세속적 팔자마저 달라지는 현 상황에선 중간을 포용하는 지성사회의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라는 도박산업이 관장하고 있는 떡의 양을 대폭 빼앗아 시민사회의 자율 영역으로 돌리지 않는 한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떡의 포장지가 아무리 화려해도 문제의 핵심은 떡과 떡고물이다.

 

남보다 자기를 먼저 의심해야

 

이런 ‘떡 이론’은 천박하거니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명분ㆍ이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모욕적일 수 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왜? 우리 모두의 투철한 자기성찰을 위해서다. 단지 ‘이름’ 하나라도 내가 얻는 ‘떡’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좀더 겸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독선과 오만은 자신의 순수성에 대한 과도한 확신(착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남 이전에 자신을 먼저 의심해 보자.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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