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새해 특집호에 실린 올해 6월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한나라당 독주 구도가 탄탄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했고, 진보정당 후보자를 찾으면서는 ‘일상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단기 전망이라 하더라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독주 구도를 흔드는 것 말고 어떤 중요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령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반한나라당 후보가 오세훈·김문수 등에게 이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대단히 중요한 성과지만, 그 파급효과로 뒤르켐이 말한 사회적 ‘기포’ 현상을 기대할 수 있다. 움직일 것 같지 않은 구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일 때 사회 구성원들은 정치동물로 확장·진작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사회적 기포 현상 속에서 작게나마 진보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우리에게 던져야 하는 물음이 “어떤 조건으로 뭉칠 것인가?”가 아니라 “뭉치면 정말 이길 수 있을까?”에 있다면, 뭉침의 조건을 앞세우기보다 뭉침의 과정에서 조건이 도출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면, 막강한 자본의 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통제력에 의해 사회의 층위가 규정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삼성 재벌 총수 이건희씨를 특사함으로써 그 자신이 걸핏하면 내세웠던 법치를 우롱한 일도 사회 구성원들의 자본에 대한 통제력 부재, 자본에 대한 자발적 복종 의식을 반영한다. 모든 사회가 자본 통제력에서 부족하지만 우리는 유럽 사회와 견줄 처지가 못 된다. 지역에서 더욱 절망적으로 드러나는 한나라당 독주 구도도 우리 사회가 어떤 층위에 머물러 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다.
물론 노동자들이 생산을 멈추거나 소비자들이 소비를 멈추면 자본의 관철 또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 그래서 원론적으로 칼자루는 노동자·민중이 쥐고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20 대 80의 양극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원론적으로 80에게 힘을 주고 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의 노동자·민중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회투쟁의 열매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지적했듯이 지배세력이 노동자·민중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고전 명제를 왜곡시킬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작용했다.
우리는 1980~90년대에 ‘의식화’라는 말을 널리 사용했는데, 그것은 지배세력에 의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의식화를 간과한 말로서 사회 인식에서 치명적인 잘못을 낳았다. 그중 하나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에 따른, 진보 역량의 가능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당선된 것 자체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될 것이라고 했던 고종석씨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별 차이가 없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맞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한나라당 독주 구도에서는 작은 차이도 중요하다고 답해야 한다.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다시 찾아왔다고 말한다면, 한나라당 독주 구도에서 비판적 지지가 올바른 지지의 형태라고 말해야 한다. 뭉침의 열매를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민주당 세력이 차지하고 진보에 돌아올 몫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애당초 지킬 기득권이 없는 진보의 몫이라고 답해야 한다.
독주 세력이 가장 꺼리는 게 무엇일까. 우리는 흔들어야 한다. 부동(不動)의 땅은 동토에 머물 것이며 흔들어야 기포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