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국정 지지율이 50% 안팎으로 상승하자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요즘 이명박이 칭찬받을 일을 했나? 첫 원전 수주, 용산참사 보상 문제의 해결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평가 기준을 바꿔보자. ‘무엇을 잘 했는가’가 아니라, ‘전보다 잘못했는가’로 하면 이해가 빠를 수 있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으면 잘한 것으로 쳐주는 것이다. 4대강 사업 예산과 노동법을 날치기했을지언정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았고, 지난 2년의 실정을 압도할 실책이 없었다. 따라서 이명박은 잘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에 대한 낮은 기대감이 지지를 높인다 해도 50%가 어딘가. 이명박 정권은 2008년 하반기 때 40%를 간절히 소망했다. 보수층을 결집하면 30%는 가능해도 당시 양분된 여론 속에서 40%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거뜬히 50%선을 넘나들다니, 이 현상을 이명박이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 걸 풀 실마리가 하나 있다. 이명박 혼자 무대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견줄 상대가 없다. 이명박을 이명박으로 비교해야 한다. 잘 해도, 못 해도 이명박, 미덥지 않아도 이명박이다.
시민들은 이명박이 잘 하는 줄 알고 속아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각종 여론 조사는 그 점에서 명백하다.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일자리를 별로 늘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노동정책이 기업 이익을 대변하는 줄도 안다. 정부의 우선 과제로 경제성장 못지않게 저소득층 복지 확대, 사회적 양극화 해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제시한다. 지난 2년간 사교육비가 더 늘고 언론의 자유는 위축되고, 갈등은 심화되고, 인권은 후퇴했으며, 살림살이가 나빠졌다는 의견이 그렇지 않다는 쪽보다 많다.
합리적 다수 모래알처럼 흩어져
이렇게 합리적 판단을 하는 시민들이 다수인데 어떻게 50%라는 마법이 가능했을까. 카스 선스타인은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라는 저서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서로 다른 크기의 직선을 실험 참가자에게 제시하고 같은 크기를 고르라고 했다. 직선들의 크기는 눈에 띄게 차이를 뒀다. 실수 확률 1%였다. 그러나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일정 집단 참가자에게 틀린 선택을 하도록 했더니 이를 본 참여자는 자기의 감각으로 인지한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이 집단을 따라 크기가 다른 직선을 골랐다. 실수 확률이 36.8%로 급증했다. 그리고 규칙을 바꿔 올바른 선택을 할 때마다 금전적 보상을 했더니 다른 집단의 선택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선택을 따랐다. 이는 고립된 개인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각자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수밖에 없다. 다수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으면 소용이 없다. 사회적 연대는 불가능하다. 지난 2년 동안 그랬다. 누구도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민주당은 항상 시원치 않고, 그렇다고 진보정당이 민주당을 대신하지도 못했다. 시민들의 합리적 판단이 보상 없이 지속될 것으로 장담할 수 없다.
이명박으로서는 이처럼 통치하기 좋은 조건이 없다. 솎아낼 대상을 찍기만 하면 된다. 원숭이를 식용으로 하는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안의 원숭이 가운데 한 원숭이를 주인이 지목하기만 하면 나머지 원숭이들은 자기가 살려고 그 원숭이를 잡아다 주인에게 바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다른 원숭이들이 살아남는가 하면 결코 아니다. 같은 방법으로 당한다. 이명박이 노조 선진화라고 하자 세 치 혀와 알량한 글로, 혹은 검을 빼들고 달려들어 노조를 공략하고, 노동법을 개악했다. 이런 사회에도 미래가 있는지 궁금하다.
대안세력 부재가 MB의 힘 근원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이 있었다. 실험 주관자는 참여자가 머뭇거리면 “문제가 없으니 충격의 강도를 높여라”라고 재촉했다. 놀랍게도 65%가 비명과 발버둥 소리를 들으면서도 강한 충격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다른 실험에서 두 사람이 미리 짠 대로 충격을 포기하자 나머지 사람도 충격을 거부했다. 실험 주관자인 전문가의 권위보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에 의존한 것이다. 한국에는 이 같은 합리적인 사람들의 집단, 정치세력이 없다. 위험한 실험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절망이 바로 이명박의 힘의 근원이다.
간만에 경향신문에 좋은 글 하나 실렸다.
수없이 쏟아지는 악성 댓글, 비방글들을 보면 이 글이 상당히 훌륭한 글임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인터넷 경향의 댓글 수준이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만, 강준만 교수 칼럼이 실리던 시절에도, 손호철 교수 칼럼이 실리던 시절에도
잘 읽었다, 동감한다는 취지의 댓글에 비해 악성 댓글의 수가 어마어마했던 것을 보면,
원래 그랬든지 아니면 어느샌가 인터넷 극우세력의 아지트(?) 비슷한 곳이 된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