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는 끊임없이 서울 중심주의, 패거리 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매번 비슷비슷한 뉘앙스라 좀 지겹지도 하지만, 간혹 읽으면 아주 좋다. 정신을 리프레쉬하는 느낌이랄까?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집단, 부패, 이기주의, 세종시 먹튀 논란, 당파적 시각, 밥그릇 싸움, 명시지와 암묵지, 원조 콤플렉스, 일극 집중 중독증, 서울/서울대 패권주의, 승자 독식주의
강준만 교수의 글들에서는 거의 늘 위와 같은 개념이 등장한다.
저런 개념들이 문제로 지적된다는 것은, 아직도 이 한국사회는 선진사회가 되기엔 멀었다는 뜻이겠지...
지난 9월부터 12월까지 한겨레에 실린 칼럼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퍼와봤다.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집단
2009-09-13
>>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76543.html
[강준만칼럼]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집단
2009-09-13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 휴가를 앞두고 읽은 책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고 한다. 1932년에 출간된 책을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읽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한 어느 신문기사 내용이 흥미롭다.
“니버가 이 책을 쓴 것은 1930년대 대공황으로 미국 내 갈등이 극심했던 때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거치며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는 지금의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이 대통령도 이런 점에 착안한 듯하다. 최근 이념과 지역 간 고질적 갈등을 지적하며 ‘근원적 처방’을 찾겠다고 공언했던 이 대통령으로선 니버의 대안에 귀 기울일 만하다.”
그럴까? 영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니버가 이 책을 쓴 주요 목적은 도덕주의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드는 개혁·진보주의자들의 비현실적인 타성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한 사람들은 주로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니버의 주장에 대해 냉소주의, 비관주의, 패배주의 등의 딱지를 붙이며 맹공했다.
이젠 상식이 되었지만, 아무리 도덕적인 개인들이라도 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권한과 책임의 분산’ 때문에 전혀 다른 특성이 나타난다. 집단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논리와 생리를 갖게 된다. 그 집단은 나라일 수도 있고 거대 조직일 수도 있다. 느슨하게 조직된 연고집단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구성된 연고집단일지라도 탐욕과 후안무치의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것이다.
재벌이건 공기업이건 언론사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거대 조직들의 구성원들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매우 예의 바르고 선량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평소 생각이 옳은 것인가 하고 회의하기도 한다. 이게 참 딜레마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평가할 때에 주요 기준으로 삼는 건 명분이나 강령 따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대인관계 태도나 인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시원찮으면 아무리 숭고하고 고상한 명분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라도 증오와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이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도덕적 우월감’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다.
‘도덕적 인간’의 함정도 있다. 니버는 “개인이 하나의 명분이나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경우에도 권력의지(혹은 힘에의 의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명분과 사적인 출세욕(명예욕)은 뒤섞이기 마련인데, 사적인 출세욕이 공적 명분의 성공을 압도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이 개혁·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늘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의심하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이념과 지역 간 고질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 처방’을 찾는다는 건 아무래도 번지수가 안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해석의 자유는 있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진보니 보수니 하고 나눌 것 없이, 어떤 집단의 지도자나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집단이 몹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이기주의와 부패는 모든 조직과 집단의 속성이다. 이 속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완화할 수 있는 길은 있다. 그건 바로 문호 개방이다. 잡다한 것을 뒤섞는 비빔밥 정신의 실천이다. 일사불란한 효율성은 좀 떨어질망정 집단이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는 건 막을 수 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세종시는 '먹튀'의 문제다
2009-10-04
>>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80083.html
[강준만칼럼] 세종시는 ‘먹튀’의 문제다
2009-10-04
정운찬 국무총리는 취임 첫날 행정복합도시 세종시 논란에 대해 “과천 같은 도시로 만들 것이냐, 송도 같은 도시로 만들 것이냐에 대해 세심하고 넓은 고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 이전에 정권의 ‘먹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고민을 우리 모두 해보면 좋겠다.
‘먹튀’란 무엇인가? 먹고 튀는 것이다. 속된 말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근시안적 기회주의를 지적하는 최상의 표현이다. 피부에 와 닿는 실감을 위해 계속 속된 말을 써보자. 5년짜리 정권에게 세종시 사업은 ‘남는 장사’가 아니다. 국토 균형발전의 과실은 훗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들어선 정권이 챙기는 것이지, 그걸 추진하는 정권은 손해만 보게 돼 있다.
그렇다면 국토 균형발전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였던 노무현 정권은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은 이들이 노 정권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균형발전 정책을 꼽는다. 정권보다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이 문제로 노 정권 시절 여러 차례 뜨거운 논쟁을 벌인 바 있는데, 당시 내 주장은 노 정권이 정략적 고려를 너무 앞세운다는 것이었다.
정권은 바뀌기 마련이다. 바뀐 정권이 균형발전 정책을 뒤엎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 정권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대못질’을 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성공하지도 못했거니와 그건 올바른 방법도 아니었다. 스스로 세종시 사업을 포함한 균형발전 정책의 단기적 손실과 부작용 등을 밝히고 장기적 국익을 국민 모두에게 납득시키면서 성공을 위한 중지를 초당파적으로 모아야 했다.
그러나 노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기적 손실과 부작용을 외면하거나 감추려고 애썼다. 교육정책과 수도권 부동산 정책은 균형발전에 역행하는 쪽으로 나갔다. 노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균형발전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 데에 있다.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선거 때 ‘재미’를 본 것까진 탓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재미를 계속 우선시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교육정책이 뒤따라 주지 않으면, 세종시는 물론 전국 각지에 세워질 혁신도시도 주말마다 수도권을 왕래하는 교통량만 폭증시키는 ‘유령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세종시 문제만 따로 떼내어 벌이는 논쟁에서 그 반대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주요 근거 중의 하나다. 그런 근거를 확보한 세종시 반대자들은 지금 온갖 궤변을 일삼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수도권 집중이 심하지 않다는 해괴한 주장까지 등장하고 있는 판국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정책은 ‘먹튀’ 정책의 전형이다. 선거 땐 충청권의 반발을 우려해 원안대로의 실천을 수없이 약속했다가, 소기의 과실을 챙긴 뒤 이젠 ‘뒷간의 법칙’에 따라 180도 표변해 딴소리를 해대고 있다. 이 정권이 진실로 애국적 견지에서 세종시 사업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했으면, 균형발전의 대의를 수용하는 걸 전제로 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사업 수정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냈어야 했다. 세종시는 ‘과천이냐, 송도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인 국익을 내팽개친 채 단기적인 정권의 이익을 추구하는 ‘먹튀’를 우리 국민이 언제까지 용인할 것이냐의 문제다.
그 문제를 다룰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당파적 시각이다. 노 정권의 모델과 정서로 이 정권의 ‘먹튀’를 견제하거나 응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정권이 그걸 역이용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세종시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비판을 선점해 스스로 밝히면서 구체적 대안과 더 큰 틀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게 ‘먹튀’에 대한 유일한 견제책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공공 암묵지’ 활용을 위해
2009-10-25
>>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83801.html
[강준만칼럼] ‘공공 암묵지’ 활용을 위해
2009-10-25
지식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여건과 정도에 따라 ‘명시지’와 ‘암묵지’로 나눌 수 있다. 명시지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이다. 학교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전형이다. 이런 명시지에 관한 한 한국은 세계적인 지식 강국이다. 불타는 향학열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기부 문화가 미성숙함에도 거액의 기부 행위가 이뤄졌다 하면 대부분 학교로 몰린다. 배움에 대한 한(恨)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그 한을 키우고 있는 한국인의 뜨거운 지식 사랑은 다른 나라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암묵지로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암묵지란 어머니의 ‘손맛’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지도자가 특정 조직을 통솔하는 법이나 기능공의 일솜씨도 암묵지에 속한다. 빼어난 맛을 자랑하는 무슨 ‘원조’ 음식점의 할머니가 그 비법은 며느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속설처럼, 우리는 암묵지를 비밀로 여겨 자기 혼자 소중히 간직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 기업들의 성공 비결을 암묵지 공유에서 찾는다. 한국에서도 삼성 등 일부 기업들이 직원들 사이의 암묵지 공유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기업에선 암묵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꽤 발달한 것 같은데, 공공 분야로 가면 전혀 딴 세상이다. 암묵지를 저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암묵지 공유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장관이나 공기업 사장은 수명이 짧은 자리임에도 전임자가 체득한 암묵지는 후임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사적으로 만나 밥 먹고 술 마시면서 듣는 이야기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다. 이렇다 할 지식과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업무와 조직문화를 제대로 파악할 때쯤이면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가 어렵게 얻은 암묵지는 다시 사장된다. 이런 시행착오의 악순환이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을 국가적으로 합산해보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런 공적 낭비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파싸움과 그에 따른 사실상의 밥그릇 싸움 때문이다. 감정적 대립과 충돌까지 가세해 업무의 기본적인 인수인계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전임자의 업적은 공과의 구분조차 없이 무조건 청산과 척결 대상이 된다. 그러니 굳이 암묵지를 공유할 필요조차 없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 기업의 최대 경쟁력은 한 사람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황제경영’이라는 역설이 성립할 수 있다. 당파싸움이 덜해 암묵지 공유의 동기부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거 이대로 좋은가? 바꿔보자. 참여정부 시절 공기업 감사를 지낸 강동원씨가 최근 출간한 <공기업 판도라의 상자: ‘반칙의 관행’에 반기를 든 감사일지>(전 2권)는 그래서 반갑다. 이런 작업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 정치 분야의 경우도 ‘기간당원제’를 추진했던 주인공들이 정당 개혁을 위한 암묵지를 책으로 낼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당파성을 배제하고 이념과 정치성향의 차이를 넘어서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만 갖는다면 책으로 쓸 수 있는 암묵지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문제는 그런 암묵지를 책으로 낼 수 있는가 하는 출판의 시장논리일 텐데, 바로 여기서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기금 조성이 우선이다. 가칭 ‘공공 암묵지 활용 위원회’ 같은 민간기구를 만들어 공정하고 투명한 출판 지원 사업을 펼치는 게 어떨까. 위원회가 너무 많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이런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사업을 위한 위원회라면 다다익선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그렇다면 ‘이명박시’로
2009-11-15
>>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87826.html
[강준만칼럼] 그렇다면 ‘이명박시’로
2009-11-15
“이 대통령 ‘세종시 수정’ 왜 밀어붙이나”(<한겨레> 11월6일치 1면) 머리기사가 제기한 질문이다. 이 기사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이 기자들에게 한 말을 소개하는 걸로 시작하고 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러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렇다.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간 이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밝힌 ‘세종시 수정’의 이유와 목적은 오직 한 가지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애국충정이다. 그런데 세종시 원안 추진을 여러 차례 약속했을 땐 그 사업의 심각한 문제점을 몰랐던 걸까? 가볍게 약속한 것도 아니고 ‘혼신의 노력’으로 ‘반드시’ 해내겠다고 한 약속이 아닌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고까지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1994년 어느 대기업이 내보낸 다음과 같은 광고 문안에 그 답이 있는 건 아닐까. “엘리샤 그레이, 그레이엄 벨보다 한 시간 늦게 전화 발명에 성공/ 하지만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어떤 일에서건 ‘최초’ 또는 ‘원조’가 되는 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 지도자의 경우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새 시대를 여는 원조로 기록되고 싶어 하는 지도자들의 야망 경쟁은 한국 정치의 익숙한 모습이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딱지가 그런 야망을 웅변해준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 그 어떤 딱지도 내세우지 않기로 했었다. 그래서 잘하는 일이라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딱지는 나름의 근거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국민이 알아서 평가할 몫이지 정부 스스로 내세우고 뻐길 일은 아니잖은가. 실제로 세 정부가 공통적으로 보인 독선과 오만엔 그런 ‘원조 콤플렉스’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런데 곧 박수를 칠 일은 아니라는 게 드러났다. 이명박 정부는 건국 60돌인 2008년을 ‘선진화 원년’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치고 나왔다. ‘선진화 원년’이라니, 그 이전엔 선진화 시도가 없었단 말인가. 이런 ‘원조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종시 수정’은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속된 말로, 세종시 사업은 남는 장사가 아니다. 아무런 생색도 낼 수 없고, 남이 먹은 밥상을 설거지하는 꼴이다. 거기 쓸 돈이 있으면 ‘원조’를 주장할 수 있는 ‘4대강 사업’에 쓰는 게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세종시’를 ‘이명박시’로 바꿔 원안대로 추진하는 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조 콤플렉스’와 무관한 일부 지식인들은 왜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해가면서까지 세종시 사업을 적극 반대하고 나서는가? 이들의 주장을 잘 뜯어보기 바란다. 시종일관 ‘효율’을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 자체는 논리적이지만, 이들은 현 ‘서울 1극 체제’의 비효율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들은 무지하거나 아니면 여전히 ‘1극 집적의 효율’을 신봉하는 ‘사회진화론적 국가주의자’들이다.
박정희 시절의 개발독재는 찬반 논란의 소지나 있지만, 이들은 세상이 크게 달라진 오늘에도 그때의 발전 모델에 중독돼 있다. 이들이 세종시 원안 추진을 주장한 박근혜를 ‘포퓰리스트’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 그들이 박근혜의 진화 속도를 전혀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언어 감각마저 퇴화된 걸까? 정치인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게 포퓰리즘이라니, 이렇게까지 말을 타락시켜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방자치선거가 무서워지는 이유
2009-12-06
>>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91844.html
[강준만칼럼] 지방자치선거가 무서워지는 이유
2009-12-06
“지방의원 범죄 심각”“존재의 이유 상실한 지방의회”
“지역사회를 죽이고 있는 기형적인 지방자치”
“호화·낭비 경쟁하는 지방청사들”
“‘제왕적 단체장’ 도덕적 해이 도 넘었다”
지방자치의 한심한 수준을 고발하는 신문기사의 제목들이다. 예외적인 기사들인가? 그렇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평범한 기사들이다. 언론의 속성상 아무래도 지방자치의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기 쉽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지방자치가 골병이 들었다는 건 분명하다. 최근 전진한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은 16개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정보공개청구 분석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각종 비리, 예산낭비, 지자체장들의 전횡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지방자치제도가 오히려 지역을 망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 …이런 현실이 계속된다면 민주주의 결과로 생겨난 지방자치제도가 국민들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할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 지방자치선거가 무서워진다.”
이런 현실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우리의 무감각과 무대응이다. 어떤 이들은 각 지역의 일당 독점과 그것을 가능케 한 망국적인 지역구도를 지방자치의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지역구도 타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럴듯한 말씀이지만, 대기업의 공정거래 위반에 대해 자본주의를 원흉으로 지목하는 것처럼 차원이 맞지 않는 해법이다. 우리는 지방자치의 문제마저도 ‘위에서 아래로’ 일시에 해결하려는 ‘일극 집중 중독증’에 빠져 있다. 이 병을 고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서울에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이 사실상 없다고 가정해보자. 민주적 국정운영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중앙권력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지방자치단체는 감시와 견제의 무풍지대로 남겨놓고서도 별 문제의식이 없다. 이마저 중앙권력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지방자치단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지역언론의 현실을 보자.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한꺼번에 싸잡아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지역언론이 사실상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더 많다. 지역신문 구독률이 5%가 안 되는 지역들이 많은 상황에서 지역신문의 문제나 비리를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다. 지역민들의 관심과 의식을 지배하는 건 중앙 의제들이다. 이걸 이대로 두고서 도대체 무슨 수로 지방자치의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쉽게 생각해보자. 지역에서 수십년간 헌신한 유능하고 깨끗한 시민운동가가 지방의원이 될 수 있는가? 현 체제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지역신문을 거의 구독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역 시민운동가의 이름을 한 사람이라도 아는 시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과 같은 무관심·불신 체제하에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단체장과 의원들도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지역신문부터 살려보자. 그간 ‘개혁론’과 ‘지원론’이 제시되었고 상호 충돌하기도 했지만, 양자택일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개혁하면서 지원하고, 지원하면서 개혁하자. 최근 프랑스 정부가 불황에 빠진 신문산업을 돕기 위해 18~24살 젊은 성인들에게 1년간 무료로 신문을 구독하게 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은 것에 주목해보자. 지역신문들이 전국지보다 훨씬 인기가 있고 영향력이 큰 프랑스에 비해 우리의 사정이 더 절박하다. 우리는 지방자치 살리기 차원에서 접근해보자. 우리의 고질적인 ‘일극 집중 중독증’을 치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쟁에 국력을 탕진하고 말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이유
2009-12-27
>> 원문: http://www.hani.co.kr/arti/SERIES/189/395725.html
[강준만칼럼]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이유
2009-12-27
지난 23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회통합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발족식에서 “서로 신념과 의견, 가치가 달라도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그런 모델을 찾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나는 사회통합이 어려운 정도를 넘어서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관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인상을 찌푸릴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이유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스스로 사회통합을 망치는 일을 하면서도 사회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모순을 줄이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일극 집중도’와 ‘해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조건에서 치열한 내부경쟁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다. 살인적인 ‘입시전쟁’과 ‘영어전쟁’이 그 어떤 처방을 해도 약화되지 않는 건 그것들이 한국 사회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극렬한 경쟁에 치를 떨면서도 경쟁만이 한국의 살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몫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경쟁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넘어서려는 진보 이념은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나아갈 길은 아니라고 보는 게 다수 민심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더라도 안에선 다른 행동양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부분은 전체와 비슷한 구조로 되풀이되는 구조를 갖는다”는 ‘프랙털 법칙’ 때문이다. 지방이 서울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각 지역에선 가장 큰 도시가 서울과 똑같은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법칙 때문이 아니겠는가.
경쟁과 통합은 양립하기 어렵다. 경쟁이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 같은 전근대적 관행을 근거로 삼을 때 통합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패거리를 중심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투쟁을 곧잘 이념투쟁이나 지역투쟁으로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이익투쟁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선 안 된다. 원인은 ‘이익’이고 ‘이념·지역’은 결과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이익·이권 구도가 뒤집어진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각종 공적기관에서도 우두머리의 교체에 따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국인들이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늘 정치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사는 이유다. 그 누구도 자신이 이익투쟁을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이익은 늘 이념과 명분으로 포장된다. 그 포장을 중심으로 해법을 찾아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결국 이익 배분의 공정화·투명화가 해법인 셈인데, 이걸 가로막는 게 껍데기일 뿐인 이념과 명분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같은 패거리의 ‘승자독식주의’가 당당하게 저질러진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같은 교회에 다니거나 같은 모임에서 몇번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이들이 탐을 내는 공직을 하나씩 꿰차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 놓고선 ‘통합’을 하자고 외침으로써 그런 ‘뜯어먹기 잔치판’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다.
공직은 봉사인데 너무 냉소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보수·진보의 구분도 없이 모두 싸잡아 이익투쟁의 전사로 간주해도 되는가?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화내라고 쓴 글이다. 이념·명분보다 이익·이권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라는 걸 전제해야 사회통합에 한 걸음이나마 다가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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