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경쟁이 부추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근본주의적 자연 개념은 너무 단순하게 경쟁을 무시하고 백안시하는 것은 아닌가? 문명적 인간 사이의 경쟁과 권력관계를 너무 부정적이고 악의적으로만 해석한 나머지, 어떠한 폭력도 없는 순수한 공생, 어떠한 갈등도 없는 평화적 공생만을 목적으로 삼는 실수가 일어나는 게 아닐까?”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더러운 철학>(개마고원)에 나오는 말이다. 놀라운 책이다. 아니 놀라운 저자다. 한국의 논객들은 대부분 편이 갈라져 있다. ‘보수에 대한 비판’ 아니면 ‘진보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보수가 보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찰하거나 진보가 진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찰하는 일은 드물다. 보수·진보의 구분을 떠나 어느 쪽에서건 ‘상식’이나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에 대해 의심해볼 것을 요구하는 일도 드물다. 김진석은 늘 그런 드문 일을 끈질기게 해내는 저자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가 자랑하는 ‘빨리빨리’의 원리는 지식인들의 글쓰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고민을 요구하는 지식인은 드물다. 대부분 화끈하고 신속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마치 이미 정해진 궤도 위를 달리는 시합을 하는 것 같다. 예컨대 경쟁을 긍정하면 보수, 경쟁을 부정하면 진보다. “경쟁을 하되 어떤 경쟁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 지식인은 드물다.
선명한 이분법을 지양하고 양쪽의 장단점을 저울질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은 더러운 일이다. 그런 고민 자체가 더럽고, 이른바 ‘진영 의식’에서 탈퇴해야 하는 일도 더럽다. 누군가를 가리키며 더럽다고 욕하는 사람에게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깨끗한가?”라고 묻는 일은 더럽다 못해 위험한 일이다. 예수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은 그 위험한 일을 우리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유혹하는 책이다.
그 유혹에 잠시 넘어가 보자.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대표 논객 열 명을 뽑아 그들이 경쟁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는지 확인해보자. 내 나름의 분석에 따르면 경쟁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넘어서 저주 일변도다. 물론 아름답긴 하다. 그런데 영 불편하다. 그들 역시 경쟁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닌가. 국가와 민족을 타도해야 할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만,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이라도 발전한 것도 역시 경쟁의 덕을 본 게 아닌가. 보수적인 세상을 넘어서 진보적인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도 경쟁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경쟁을 저주하는 걸까? 물론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저주하는 것이겠지만, ‘경쟁’이라는 단어까지 쓰레기통에 내버리면 도대체 무엇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겠다는 것일까?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도 더럽다는 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착각은 아닐까? ‘경쟁’을 보수에게 헌납한 사람들에게 유권자들이 무슨 믿음으로 표를 줄 수 있을까?
대기업의 중소기업 착취가 진정한 경쟁인가? 학벌 간판을 놓고 싸우는 입시전쟁이 진정한 경쟁인가? 정글의 법칙에 따른 약육강식이 진정한 경쟁이란 말인가? 진보는 경쟁을 부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경쟁을 해보자며 ‘경쟁’을 선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진보가 기존의 경쟁관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약육강식형 경쟁관을 가진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에서 내가 읽은 메시지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훌륭한 견해다.
강준만 교수의 글은 늘 2% 부족한 무언가를 짚어낸다.
진영논리... 경쟁 저주...
맞다. '경쟁'은 부정할 것이 아니라 선점하고 장악하여 올바른, 진정한 의미의 경쟁으로 내용을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