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개한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칼럼이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과 <레디앙>에 ‘망명’한 원고에서 삼성 불매운동을 당연한 과제로 제기한 김 교수는 자신의 글을 싣지 못한 “경향을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독립 언론의 길을 걷도록 더 열심히 돕는 길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말했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언론은 생존수단이 존재이유를 훼손하면 불가능”한데, 김 교수 칼럼의 망명 사연은 오늘 한국의 진보언론이 겪는 존재론적 아픔의 속살을 드러낸다.
과연 그 누구인가, 이틀 뒤 1면에 사과문을 실은 경향신문과, <삼성을 생각한다>의 내용을 사회면 머리기사로 소개하기는 했으나 책 광고는 관행인 할인가격 대신 정상가격을 요구하여 아직 게재되지 않고 있는 <한겨레>에 내면화한 굴종을 자백하라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명예훼손 가능성을 따지며 싣지 못한 <오마이뉴스> 편집장의 해명 글을 읽으면서도 나에게 다가온 것은 아픔이었다. 오늘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한다”는 이건희 삼성 총수의 말보다 더 모욕적인 언사를 잘 알지 못하는 나 또한 이 칼럼이 실릴 것인지 가늠하면서 제목을 ‘아픔’이라고 에두르는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일찍이 일인 폭군 통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물었던 에티엔 드 라 보에티는 그 답을 만인의 ‘자발적 복종’에서 찾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의 나이는 고작 18살이었는데, 이 16세기 인물의 발언이 21세기 한국에서 그대로 적용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야 한다. 그것이 단돈 48억원(증여세 16억원 제외)으로 연 200조 매출 기업의 경영을 결국 ‘합법’적으로 승계하게 된 과정을 알기 위해서나, 삼성 떡값을 챙겼다는 의혹을 사도 법무장관이 될 수 있는 우리 사회 메커니즘을 알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물신 지배에 순응하여 인간 본성의 발현인 자유인의 길이 아닌 굴종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하여 들씌워진 욕망체계로 인간성을 훼손하는 데까지 이른 우리의 아픈 몰골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가령 오늘 우리의 존재와 의식은 각기 인간을 위한 청정구역이 아닌 삼성전자 칩을 위한 청정구역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쓰러진 노동자들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노조 부정은 기본이고 장애인 2% 고용 의무까지 철저히 외면하는 삼성 편에 서 있는가.
<삼성을 생각한다>는 또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전에 한국 사회의 정치이념 지형을 수구적 보수, 자유주의 보수, 진보로 나누어 앞의 둘 사이의 구분선을 국가보안법, 뒤의 둘 사이의 구분선을 신자유주의라고 했는데, 앞으로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라는 어려운 말 대신 ‘삼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게 그 하나다. 우리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신자유주의와 달리 삼성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픔은 대개 슬픔을 낳고 그것을 나눔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아픔은 슬픔을 동반하기엔 그 뿌리가 워낙 추악하다. 그래서 뽑는 것밖에는 치유의 길이 없다는 게 또다른 하나다.
한 달 전, 도시 생활을 접고 외딴섬에 정착한 분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거기엔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함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작년 여름, 오랫동안 사용하던 삼성 신용카드를 철회한 것이 그나마 유일하게 행동으로 옮겼던 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