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최근 고려대 김예슬 학생의 대학거부 선언이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대자보를 붙이고 일인시위를 벌인 이유를 “약하기 때문에,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라고 밝힌 그는, 자신의 얘기를 세 장의 대자보에 담을 수 없었다며 책 <김예슬 선언>으로 펴내는 경쾌한 행보를 보였다.
한편, <인권연대> 소식지 최근호에는 이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의 ‘좌절’의 변이 실렸다. 만약 지방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았을까?”라고 질문을 던진 그는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한국 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서열화된 대학체제,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대학, 국가, 시장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을 강력하게 떠받치는 강력한 장치의 하나다. ‘스카이’(SKY), ‘인(in) 서울’, ‘지잡대’(지방의 잡다한 대학)의 구분은 대학생일 때부터 이미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거부든, 저항이든, 탈주든 사회적 발언을 하는 데서도 그럴 자격이 있는 자를 소수로 묶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거부할 자격조차 없이 대학에서 조용히 벗어나고 있다.
김예슬 학생은 고려대에서 세 번 울었다고 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400억원을 기부하여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오고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하여 출교까지 당했던 2005년 삼성 사태 때, 2006년 ‘글로벌 고대’라는 말이 자랑스럽게 사용되던 즈음 이스라엘과 미국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그리고 2008년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시이오(CEO)이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뉴욕 발언을 고려대의 ‘이명박 라운지’에서 신문으로 읽었을 때다. 그렇게 세 번 울었던 이의 정체성도 ‘대학생 김예슬’이나 ‘인간 김예슬’보다 ‘고대생 김예슬’에 가깝다. 심지어 거부한 뒤에도 고려대라는 이름은 그림자든 아우라든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대학 간판이라는 소유물은 다른 소유물과 달리 존재가 거부한다고 해도 그 존재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남는다.
19세기 중엽 유럽 반동의 기수 메테르니히는 대학 문을 닫아 국가의 구실을 가르쳐주었는데, 그때는 아직 자본이 대학을 장악하기 전이었다. 오늘 우리는 자본이 대학을 장악해나가고 그것을 매개로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과 담론, 욕망체계 속에 구성원들을 꼼짝 못하게 가두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대학서열체제가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하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령 ‘대학생 연대’라는 말도 이 체제에 단호히 맞서지 않는 한 허사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내면화하거나 현실논리로 받아들임으로써 분할지배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학서열체제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남는 건 ‘나 홀로 자유’이거나 ‘소집단 안에서의 자유’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것은 참된 자유의 모습이 아니다.
“대학을 가지 못한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전한” 김예슬 학생의 성찰적 자세가 대학서열체제에 관한 물음에 이르기 바란다. 그의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