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과 자책감을 뒤로한 채 모든 책임과 허물을 제가 짊어지고 총리 자리를 떠나고자 한다.” 정운찬 총리의 퇴임의 변이다. 그야말로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수정을 위한 ‘얼굴마담’으로 총리가 되었다가 그 구실이 소진되면서 자리를 떠나는 것인가. 앞서 이 난에 썼던 “천안함의 진실과 북한주적론”의 마지막에 “모두 진실 찾기에 나서야겠는데 정운찬 총리의 학자적 양심에 마지막으로 호소해보는 것은 무망한 기대일까”라고 썼다가 전규찬씨에게서 호되면서 정당한 비판을 받았는데, 결국 그렇게 속절없이 마감하고 마는가.
정 총리는 취임 당시 “할 말은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엔 안보리에 서한을 보낸 참여연대를 향해 던진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는 발언이다. 과문한 탓인지,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총리로서, 특히 서울대 총장 출신으로서 가령 상지대 사태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용산참사 문제를 해결한 것을 잘한 일로 꼽는다지만 용산은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아버지를 죽인 방화범이 되어 법정에서 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애당초 그의 정서는 불관용으로 악착스런 이 정권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권좌의 길을 택했다. 후배와 제자들의 끈질긴 만류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에게서 학문적 심지로서는 유약한 대신 “우리가 나라를 이끄는 주역이다”라는 주장 뒤에 숨어 있는 권좌에 대한 친화력에서는 무척 강한 한국 사회 엘리트의 자화상을 확인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는 분명 모순인데, 그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가 진실을 위해, 가난한 약자들을 위해 발언하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와 함께 보낸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작용했음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과거 서울 문리대와 법대가 있던 동숭동 뒤편 낙산 주변에는 휴전 후 귀성한 피란민들이 덕지덕지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다. 같은 학군 안에서 가난했거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의 자식들은 창경국민학교에 다녔고 여유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창경을 피해 혜화나 효제학교를 다녔다. 동네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창경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런 노래를 불렀다. “창경! 창경! 거지 떼들아, 깡통을 옆에 차고 혜화학교로!” 그래도 당시는 아직 “개천에서 용 날” 때였고 그 학교에서 모든 과목에서 월등했던 뒤짱구와 산수를 잘했던 옆짱구 둘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두 짱구는 분야는 달랐지만 승승장구 엘리트의 길을 밟았다. 뒤짱구는 나중에 용케 군대도 가지 않고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 유학한 뒤 서울대 교수와 총장이 되었는데, 옆짱구는 아뿔싸 선배를 ‘잘못’ 만나 전태일을 느껴야 했고 리영희와 ‘731부대-마루타’를 읽어야 했으며 34개월 보름 동안 사병 생활을 한 뒤 유럽 땅에서 난민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따로 세월을 보낸 뒤, 뒤짱구가 총리가 되어 용산참사 문제를 해결하겠노라고 약속했는데 지지부진했던 어느날 옆짱구는 총리공관 앞에서 경찰들에 둘러싸인 채 1인시위를 벌였다.
모두 가난했던 그때 그 골목에서 가난은 죄가 아니었다. 인간성 발현의 토양이었다. 사람의 의식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또 변하기도 하지만 정서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에 포획된 것일까. 의식은 때때로 반인간성의 한계를 넘게 하지만 인간 정서는 그것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는 믿음까지. 평소 인간 정서를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의식을 표적으로 삼는 옆짱구의 기억 속에서 뒤짱구는 유약한 정서의 소유자다. 그래서 옆짱구의 의식은 뒤짱구가 잘못된 사회의 잘난 톱니바퀴가 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정서는 끝내 그러지 못한다. 두 짱구는 앞으로 기껏해야 상갓집에서나 조우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