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http://www.inmul.co.kr/xroz/sub_read.html?uid=2235§ion=section1
왜 미국은 ‘제2의 한국’인가?
인물과사상-2010.06
강준만
‘일중독’·‘출세지향성’·‘평등주의와 물질주의의 결합’
“미국 정보기술(IT) 기업에 도전정신이 넘치는 건 미국 사회 특유의 개방성과 혼혈주의가 한몫했다고 봐요. 우리나라도 외국인 이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합니다.” 2010년 4월 삼성전자 상임고문 윤종용이 내놓은 주장이다. 그는 “중국·베트남 등지에서 10~15년에 걸쳐 아시아계 남녀 100만 명씩 모두 20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했다.(이필재 2010)
파격적인 제안이다. 한국과 미국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한국은 미국에 비해 다양성이 크게 부족한 나라다. 그밖에도 두 나라 사이의 차이점은 많지만, 의외로 같은 점도 많다. 아니 같은 점이 더 많다. 이 지구상에서 미국을 가장 빼박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덩치로 봐선 한국을 ‘제2의 미국’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한국의 역사가 훨씬 앞서니 미국을 ‘제2의 한국’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미국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2008)의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를 읽으면서 “미국과 가장 닮은 나라는 한국”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사실상 미국 국민성에 관한 책이다. 무엇이 닮았는가?
첫째, 일중독이다. 브룩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지구상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우리는 부유한 국가들 중 가장 긴 노동시간을 견디지만, 휴가 기간은 가장 적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른 나라와 달리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거의 절반의 미국인들이 휴가를 떠난 동안에도 일터 상황을 자발적으로 체크한다.”
두 번째, 출세지향성이다. 브룩스는 “학교에서는 젊은이들의 인성을 길러주는 책임을 매우 등한시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대학 입학시험 준비, 재활용 습관, 두뇌계발, 음주와 운전습관에 신경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올바른 인성을 기르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도, 갑자기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얘들아’라는 식이다. 자유방임적 윤리관이 지배적이다.
…… 세상에는 오직 여섯 가지 직업밖에 없다고 여기는 학생도 있다. 그래서 의사, 변호사, 회사 중역 등 몇 개 직업만 정해놓은 채 다른 독특한 직업에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잘 알려진 길을 간다. 이상하게도 엘리트 체제는 전문성을 그토록 중시하면서도 직업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평등주의와 물질주의의 결합이다. 미국에 관한 외국 문학작품들을 연구한 미국 역사가 헨리 스틸 코메이저(Henry Steele Commager)는 외국인들이 미국의 장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일관된 비판을 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등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히려 개성과 재능이 떨어진다. 물질적 안위에 대한 관심은 결국 물질 만능주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오직 탐닉에만 빠져 번창하는 예술과 비슷하다. 일 또는 활동에 대한 열정이 지나치다. 삶의 다른 여러 즐거움에는 관심을 두지 못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무례한 면이 있다. 관용의 정신은 도가 넘어 천박함과 타락으로 변질되었다. 사생활 침해가 만연하고, 평범함만 추구하며, 법과 질서를 어기고 있다. 과도한 활동성이 오히려 불안정성을 불러와 근본마저 흔들리게 한다. 미국의 모든 것은 일시적인 느낌을 줄 뿐이다.”
‘드림’·‘승자 독식주의’
넷째, ‘아메리칸 드림’과 ‘코리안 드림’이 닮았다. 위 세 가지 공통점의 당연한 귀결이다. 세상에 ‘드림’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느냐고 반론을 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나라만큼 ‘드림’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드물다. ‘아메리칸 드림’은 신화이며 사기라고 하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그게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다만 ‘코리안 드림’은 ‘아메리칸 드림’과는 달리, 학력·학벌 위주라는 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한국에선 “사교육비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서민들조차 그 원인인 ‘대학서열화’를 타파하는 일엔 별 관심이 없다. “내 자식을 SKY에 보내면 되지”라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드림’에 들뜬 사람들은 실용적이거나 현세적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철학엔 영 관심이 없다. ‘빨리빨리’에 중독된 나머지 구조를 바꾸는 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한다.
다섯째, 승자 독식주의다. 위 네 가지 공통점의 당연한 귀결이다. “대통령제는 승자 독식의 제도다. 사실 승자 독식으로 치면 미국이 우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갈등이 더 악성이고 고질적인 것은 우리 대선이 승자 독식에다 ‘패자 절망’의 제도로 돼버렸기 때문이다. 절망한 사람에게 ‘협상하라’ ‘합리적으로 하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얘기다. 절망한 사람의 눈엔 핏발이 서고 목에선 쇳소리가 난다. 정상적인 대화가 될 리가 없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양상훈(2009)의 주장이다. 이 칼럼의 취지와 선의엔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데, “승자 독식으로 치면 미국이 우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대목이 영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생각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승자 독식 구조를 바꿔보자고 그러면 “미국이 더하다”는 게 바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의 논거로까지 쓰이니 이거 아주 고약한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턱도 없는’ 말씀이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50개 주의 내정을 건드리는 데엔 명백한 한계가 있다. 미국의 승자 독식은 연방정부의 구성에만 국한된다. 반면 한국은 대통령 한 명이 바뀌면 전국 방방곡곡의 말단 행정부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공기업과 민간 기업까지 흔들린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럼에도 두 나라 모두 승자 독식주의가 심하다는 건 분명하다.
‘압축성장’
여섯째, 압축성장이다. 이 책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과 한국의 공통점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바로 ‘압축성장(condensed economic growth)’이다. 다니엘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 1991)은 “이 신생국 미국은 유럽이 2000년 동안 경험했던 것을 한두 세기로 역사를 압축시켜 놓았다”며 이렇게 말한다. “아메리카는 하나의 근대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단계들 가운데서 몇 단계는 거치지 않았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빨리 전진하면서 아메리카는 봉건 제도를 거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충성심이 여러 갈래로 분리되지도 않았고 귀족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기 아메리카에서 역사는, 서유럽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정상 속도보다 다섯 배나 빨리 나타나는 빠른 영화의 화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더 빨랐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1년은 세계의 10년”이라는 구호 아래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또는 ‘전쟁하듯이’ 일했다. 그러니 어찌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장이 빠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한국의 압축성장은 인류사에 있어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압축성장은 어느 정도였나? 한국의 압축성장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세 사람의 묘사를 소개한다.
△복거일: “영국이 1780년에서 1838년까지, 58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배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1839년에서 1886년까지 47년 만에 갑절로 늘었고, 일본은 1885년에서 1919년까지 34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66년에서 1977년까지 11년 만에 배로 늘었습니다. 몸집이 갑자기 늘어나니까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복거일 외 1998)
△한홍구: “우리가 겪은 근대화의 특징은 이식(移植) 근대화이면서 동시에 압축 근대화라는 점이다. 한 예로 도시화 비율을 보면 1949년 17.3%이던 것이 1960년 28%, 1980년 57.3%, 1995년 78.5%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서구에서 최소 150년에서 200년은 걸렸을 변화를 우리는 불과 30~40년 만에 해치운 것이다.”(한홍구 2003)
△김진경: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100년 동안에 서구의 근대 300년의 변화를 압축해 따라갔다면 한국은 60년대 이래 30년 동안에 서구의 300년을 압축해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속도 속에서, 이러한 광기 어린 변화 속에서--좀 과장해 말한다면--우리는 30년의 생물학적 시간에 300년의 서사적 시간을 살아버린 것입니다. 무서운 속도의 서구 흉내 내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일로도 간주되지 않았습니다.”(정영태 2001)
미국이나 한국 모두 자신을 돌아보는 일엔 서투르다. 아니 그걸 불필요한 사치로 생각한다. ‘깊이’를 희생으로 한 ‘실용’과 ‘속도’에 능하다. 거칠게 나누자면,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한국 지식인들 중 미국파에 우파가 많고 유럽파에 좌파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실속’ 위주론 미국을 지향하고, ‘상징’ 위주론 유럽을 지향한다고나 할까?
‘이동성’
일곱째, 높은 이동성이다. 그런데 이건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겉보기엔 공통점이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좀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큰 문제이기도 하니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는 “역사학의 기본 영역은 시간이지만, 미국인들 생각의 기본 영역은 공간이다”라고 했다. 미국인들은 시간보다는 공간에 대한 감각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이주영 1995)
이 말은 여러 해석을 낳을 수 있지만, 미국의 많은 논자들이 강조하는 건 미국인들의 잦은 공간적 이동성이다. 미국은 늘 이동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 나온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일생 동안 평균 13번을 이사하고(영국인들은 8번, 일본인들은 5번), 10회 직업을 바꿨다고 한다.(Time-Life 1988)
1995년과 2000년 사이에 미국 인구의 46%가 이동을 경험했다. 직업 보유 기간도 평균 6.9년으로 프랑스 10.4년, 독일 10.8년, 일본 11.3년에 비해 훨씬 짧다. 심지어 종교도 자주 바꾼다. 신에 대한 믿음은 미국인 58%, 프랑스 12%, 영국 19%였지만, 성인 미국인의 25%가 개종을 경험했다. 전 인구의 4분의 3이 평소 기부를 하는 미국인들은 유동성에 대한 한계 등을 혐오해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세금은 GDP의 3분의 1 정도로 스웨덴 52%, 벨기에·프랑스 40%에 비해 훨씬 적다. 브룩스는 이런 통계들을 거론하면서 “미국의 예외주의는 바로 에너지, 잦은 이동성, 더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혹 이동성은 주로 국토 사이즈와 관련된 문제는 아닐까? 20세기 동안 프랑스 인구는 52%, 독일은 46%, 영국은 42% 증가한 반면, 미국의 인구는 270%나 증가했다고 한다. 이 또한 국토 사이즈의 축복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땅이 넓으니 집도 크다. 미국인 1인당 주택 면적은 66평방미터로 세계 1위다. 호주가 2위로 51평방미터고, 그밖에 캐나다 41, 네덜란드 20, 일본 15다. 앞서가는 사람들은 ‘규모의 경제’는 갔고 ‘범위의 경제’가 도래했다고 주장하지만, 과장이 심하다. 여전히 ‘규모의 경제’ 파워는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브룩스는 다른 맥락에서 소개했지만, 그의 책엔 사이즈가 우리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감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노르웨이 출신의 어느 지도 제작자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 거리 감각에 변화가 생겼다고 밝힌 이야기다.
“미국에 도착한 유럽인은 처음에는 관점뿐만 아니라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제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점차 자신의 스케일을 넓히게 된다. 이전에는 300킬로미터 거리가 상당히 멀게 느껴졌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처럼 여겨졌다. 미국의 공기를 마시자마자 이전에 있던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규모로 틀을 세우고 설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사이즈는 무시한 채 미국인의 이동성 강조는 아예 사회통념으로 굳어져버렸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2004)도 20세기 말 미국인들의 16~17%는 매년 이사를 했으며, 1999년 3월부터 2000년 3월까지 43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주거지를 옮겼다는 통계 수치를 제시하면서 “미국인들은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 깊은 개인적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드물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2000년 미국 정부가 센서스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70만 가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대상의 67%가 태어난 주에서 계속 거주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미국에서 자신이 태어난 주에서 계속 거주하는 원주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뉴욕주로 주민의 82.4%가 이곳 출신이다. 다음은 펜실베이니아(81.7%), 루이지애나(80.3%), 미시간(78.9%), 오하이오(76.6%)의 순이다. 반면 원주민의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은 네바다주(28.2%)였으며 이어 애리조나(39.1%), 플로리다(39.5%), 알래스카(39.4%), 와이오밍(42.35%) 순이었다.(한기홍 2001) 즉, 주(州) 내의 이동이냐 주(州) 사이의 이동이냐를 따져봐야지 한꺼번에 싸잡아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라 밖을 생각하면 미국인의 이동성은 아예 신화가 된다. 미국인 중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비율은 고작 7~8%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에 관심을 끊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영우 2006)
‘주택의 재테크화’ 현상
잦은 이사로 말하자면, 한국을 따라갈 나라가 드물다. 재테크로 변질된 아파트 중심의 주거 구조 때문이다. ‘주택의 재테크화’ 현상으로 인해 아파트 거주자들은 늘 이사 갈 준비를 하는 삶의 자세로 자신의 거주 지역을 대한다. ‘살 집(house of living)’이 아니라 ‘팔 집(house of sale)’인 셈이다. 잦은 이사는 위치구속성(situatedness)의 탈피를 가져오고, 이로 인한 개인들의 심리적 불안과 위험, 정체성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된 지 오래다(Giddens 1997). 이런 우려는 거주 이동성이 매우 높은 한국에서 본격적인 검증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기준 선진국에선 전체 주택의 5% 범위 내에서 거래가 이루어진 반면, 한국은 거의 20%에 이른다. 평균 거주 기간도 아파트가 많은 도시지역일수록 짧다. 서울 5.4년, 경기도 6.0년, 인천 6.8년인 데 비해 지방은 9.9년이며 군 단위 지역은 15.7년이다. 특히 재건축 재개발 붐은 한국 아파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한국의 주택수명은 약 14.8년으로 일본의 2분의 1, 독일의 4분의 1, 프랑스의 6분의 1, 미국의 7분의 1, 영국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박철수 2006). 잦은 이동성 때문에 아파트의 문패가 실종되는 등 익명성도 심화되고 있다. 아파트 내부에서도 가전제품은 개전제품화되고 가족 성원들끼리도 점점 더 얼굴을 안 보게 되는 라이프스타일이 자리 잡는다. 그래서 “도대체 아파트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까지 제기된다(전상인 2009).
이런 노마드적 주거생활 탓에 지역공동체를 위한 사회자본의 축적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 서울보다는 지방 도시들의 아파트 비율이 더 높은 점이 지역공동체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앞으로 심층 연구할 만한 주제다. 주요 도시별 아파트 거주비율은 광주 70.0%, 울산 64.1%, 대전 63.8%, 경기도 62.4%, 대구 60.1%, 부산 57.4%, 서울 55.7% 등이다(윤희일 2007). 그간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어온 광주엔 아직도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가? 공론화되질 않아서 그렇지, 광주의 시민운동가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큰일 났다”는 것이다. 광주는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더 이상 선진 지역이 아니다(문순태 2007, 안경호 2009, 안관옥 2009, 장은교 2007). 이게 과연 70.9%라는 아파트 거주율과 무관할까?
우리는 공공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주로 언론 등 정보미디어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정보미디어의 수용환경, 즉 아파트 같은 거주 체제가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광주의 아파트와 공동체의식의 관계는 앞으로 시도할 가치가 충분한 좋은 실증 연구 사례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 또한 미국의 경우처럼 이동의 범주와 거리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이동을 하건 연고는 건재하다. 아니 오히려 잦은 이사가 연고의 중요성을 더 키운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동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동일 지역 내 이동이라면 별 의미가 없다. 연고 중심의 공식?비공식 조직이 지역의 모든 권력 체계를 장악함으로써 변화와 혁신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나타난다.(강준만 2006b·2010a)
‘전국의 지역화’ 또는 ‘지역의 전국화’
지역 간 이동이 아무리 잦다 하더라도 ‘국가적’ 공동체의식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이 또한 사이즈와 관련이 있다. 최재천이 잘 지적했듯이, “(미국은) 워낙 땅이 넓다 보니 보스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도 저 와이오밍 산골에서는 그 변화가 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똑같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하나의 똘똘 뭉친 집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완전히 거국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도정일·최재천 2005).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의 기부 문화를 부러워하지만, 그게 무슨 인간성이나 시민의식 때문에 빚어진 차이는 아니다. 작은 사이즈로 인해 한국에선 ‘전국의 지역화’ 또는 ‘지역의 전국화’가 발생하는 게 주요 이유다. 미국의 기부 문화 풍토에 대해 다니엘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 1991)은 미국에선 지역사회가 정부보다 먼저 생겨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유럽인들이 미국에 와서 자주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미국인들의 성실한 세금 납부라고 한다. 부어스틴은 “이것은 미국인들이 정부를 자기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인으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미국에선 지역사회 우선주의가 투철하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에선 기부를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마저 그런다. 지방에서 성공한 사람 대부분은 서울 소재 대학들을 나왔는데, 이들은 큰돈을 기부해도 그 서울 소재 대학들에 하지 자신이 사는 지역의 대학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미국 모두 이동성이 높은 나라라는 건 같다. 앞서 거론한 ‘일 중독’·‘출세지향성’·‘평등주의와 물질주의의 결합’·‘드림’·‘승자독식주의’·‘압축성장’ 등의 원인이자 결과일 수 있다. 이런 공통점에 대해 한국이 워낙 친미 국가라 미국을 닮아가게 된 게 아니겠느냐는 주장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미국 의존도가 높고 많은 한국인이 원정출산도 불사해가면서까지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도 단지 미국이 가장 강한 나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뭔가 비슷한 친화성이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계적으로 낯 뜨거운 ‘원정출산’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국가적 자긍심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한국의 반미주의자들 중에 자식 교육만큼은 미국에서 시키는 분이 많은 것도 그렇게 이해하는 게 속 편하지 않겠는가. 반미를 능가하는 게 ‘일 중독’·‘출세지향성’·‘평등주의와 물질주의의 결합’·‘드림’·‘승자독식주의’·‘압축성장’·‘이동성’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10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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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fe 북스 편집부,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편집부 옮김, 『미국』(‘세계의 국가’ 시리즈),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8.
2010/05/19 [17:14] ⓒ인물과사상
내용이 좀 긴데, 재미있고 읽을 만 하다.
미국과 한국이 많은 면에서 닮은 꼴이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미국을 닮으려고 노력해서 그런 것이든, 원래 급성장을 경험한 사회가 그런 것이든...
미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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