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이번 2학기부터 서울 지역 초중고교 체벌 규정을 삭제하고 9월 안으로 체벌대체 방안이 포함된 학생생활규정을 만들라고 일선 학교에 지시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교장들 중 30여명은 반발하여 자리를 뜨기도 했는데, 곽 교육감은 “체벌 금지는 10년 이상 논쟁을 거듭해 온 만큼 이제 찬반토론의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그동안 ‘뜨거운 감자’에 속했던 이 문제에 쐐기를 박았다.
일부 교장이 반발하는 것은 오랫동안 몸에 밴 국가주의 교육의 반영이라 하겠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일선 교사들의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는 교사들 중에도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몇몇 문제 학생들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서 교실 통제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도 최소한의 체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사랑의 매’ 운운하기도 하는데, 유럽 나라들에서는 물론 이웃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의 하나다.
이 땅에 관립소학교가 1894년, 관립중학교가 1900년에 처음 설립된 것을 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근대식 초중고가 정형화된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절이었다. 병영을 본뜬 학교 구조(운동장연병장, 교단사열대, 수위실위병소)나 교장 임용제도나 모두 군국주의 일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를 길러내기 위한 국가주의 교육을 관철하려는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철저히 배제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율성이다. 노예 백성들인데 매로 다스리면 되는 것이지 자율성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1948년에 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일제부역세력이 지배하면서 국가주의 교육 구조의 틀은 그대로인 채 경쟁만 중시하는 시장주의와 결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이 민주공화국의 주체를 형성하는 일임에도 그 소명이 배반당했듯이 자율성은 여지없이 실종되었다. 학생들 스스로 지킬 학칙이나 생활규정을 만드는 데 학생들이 주체로 참여하는 등의 자율성은 배제한 채 체벌이 21세기에 한국의 학교에 완강하게 자리잡게 된 배경의 하나다. 다시 말해, 우리 학교는 민주공화국의 주체를 형성하는 학교가 아니다. 교장과 교사가 민주공화국의 주체가 아닐 때 학생들을 민주공화국의 주체로 형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사들이 교장의 관리 통제의 대상에 머물 때, 학생들을 관리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잡고 폭력에 의존하면서 무감각해진 것이 아닐까. 무슨 문제든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발상 자체가 폭력적임에도.
아내가 가끔 털어놓는 얘기가 있다. 여섯 살 때 프랑스 땅을 처음 밟은 딸아이가 집에서 가까운 공원에서 또래의 흑인, 백인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돌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여기 애들은 왜 나를 안 때려?” 아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잘 놀았다. 배우는(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몸에 익히는 것이다. 배운 것을 행동에 옮기려면 의지를 필요로 하지만, 습(習)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수천번 가르치기보다 폭력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관건인 것이다. 사이버 세계든 현실 세계든 온통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배움터인 학교만큼은 폭력에서 벗어난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체벌 없이는 교실 통제가 안 되고,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체벌 없이 어떻게 교육이 이뤄지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는가. 나아가 그렇게 체벌의 효용성을 완강히 고집하고 질서와 통제를 강조하는 한국의 교실이 다른 나라들의 교실에 비해 계속 체벌을 고집하고 질서와 통제를 강조해야 할 만큼 무질서하고 통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차이가 학생들에게 자율성을 주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