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3일 취임 인사차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은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은 “위원장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해 너무 감사하다. 우리도 민주노총을 ‘우리 민주노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국 사회에서 조합원들이나 현장 활동가들 위에 군림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조직의 지도층이 공권력 앞에서 주눅들거나 황송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노총과 자리바꿈을 한 듯한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번 행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배제된 자’에 적대적인 ‘포함된 자’”에서 ‘포함된 자’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행정자치부를 행정안전부로 바꾼 것처럼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꾼 것도 이명박 정권의 지향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령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노동허가제가 아닌 고용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노동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고용의 주체는 고용주라는 점에서 노동허가제와 고용허가제는 전혀 상반된 노동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 실질에 있어서는 ‘노동통제부’에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이름만큼은 그래도 노동부였던 것을 고용노동부라고 바꾼 것인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에 맞게 실제로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운다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일컬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제된 자들 중에는 오늘도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에서 두 달째 노숙 투쟁을 벌이는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이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900여명은 모두 기아자동차 ‘모닝’을 생산하지만 기아자동차 노동자가 아닌, 17개 외주하청업체에 소속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이엠에프 환란 직후인 1998년, 정치권과 자본의 전방위 압력을 받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가장 약한 고리인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는 데 합의했던 과정과 그에 따른 투쟁을 형상화한 게 <밥·꽃·양>인데, 일단 물꼬가 터진 뒤 ‘전 생산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는, 사용자에게 억만금의 이윤을 챙기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개념은 지제크에게서 빌려올 필요 없이 쌍용자동차 사태를 돌이켜보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배제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게 공권력의 역할임을, 또한 ‘포함된 자’가 자칫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우면 그 또한 ‘배제된 자’가 되어야 함을 쌍용자동차 사태는 가르쳐주었다. 복종하여 포함될 것이냐, 싸우다 배제될 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노동계가 그간 보인 대응은 전자 우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고용노동부는 지난 7월22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불법파견, 정규직 지위 확인’ 판결의 현장파급효과를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사용자들에게 단체협약을 바꾸도록 압박하고 있다. 대법 판결 이후 현장에서 그나마 되살아나고 있는 연대 동력을 무력화하면서 지금까지처럼 노동을 순치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에만 눈길을 주는 게 관성이 된 탓인가, <한겨레>를 포함하여 진보매체에서조차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대법 판결 이후 현장의 움직임을 기사화하는 데 인색하다.
여야 정치권 사이의 싸움이 아무리 요란해도 결국 이건희의 품 안에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이며, 민주당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지만 새만금을 밀어붙였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 통합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통합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마땅하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표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진보는 거추장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