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지 않은 세력이 주창한 ‘공정사회’에 반하는 불공정 행위자로 지목되어 퇴출당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스스로 불공정하게 희생되었다고 억울해하지 않을까? 이처럼 공정과 불공정이 뒤죽박죽되는 것은 회색인들의 사회의 반영이다. 회색은 검정 바탕일 때 희게 보이지만 흰색 바탕일 땐 검게 보인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쓴 김용철 변호사를 ‘정의의 고발자’보다는 ‘배신자’로 지목하듯이 회색인들이 흰색을 꺼리는 것이 자신을 검게 드러내기 때문이라면, 유명환 전 장관의 예처럼 검정을 색출했다며 요란 떠는 것은 자신이 희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본디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해야 할 행위’와 ‘하면 안 될 행위’를 구분하여 실행하는 대신 멈출 줄 아는 것은 자율성에 기초한 절제에서 나온다. 각자에게 요구되는 자율성은 주위의 비판, 견제와 상호작용을 하여 법 적용 이전에 공정사회의 밑거름이 된다. 우리 사회가 공정사회와 거리가 먼 것은 각자 내면의 자율성도 부족하지만 옆이나 아래로부터의 견제와 비판이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자신까지 적당히 속이며 살아가는 회색인들의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회색인들의 사회의 정점에 삼성이 있다. 그런데 회색인의 사회에 익숙해진 탓일까, 지식인들조차 삼성 앞에서는 단호하기보다 모호하며 비겁하기까지 하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으로 국가의 공공부문을 전방위적이며 장기간에 걸쳐 ‘관리’함으로써 근대공화국의 근간인 공공성을 유린하고 사회부문간 횡적 견제와 비판의 기능까지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욕망의 주술로 국민의 비판과 견제의 힘도 약화시킨 삼성의 실체를 파헤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지식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검은 회색 구름이 파란 하늘을 온통 가렸는데도 별을 노래하는 문인들이 문단의 주를 이루는 듯하다.
최근 검찰이 기업 비리와 비자금을 파헤치고 있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작은 구름 몇 개가 사라진다고 파란 하늘이 보일 리 없다. 온갖 비리와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은 삼성에 비추어, 그 기업들은 다만 국가 공공부문을 장기간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비리의 규모, 비자금의 규모가 작은 기업일 뿐이다.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최근 다른 필자들과 함께 펴낸 <굿바이 삼성>에서 “삼성불매운동의 철학적 기초”에 관해 논했는데, 우리가 삼성과 거래하지 않아야 하는 데에는 정의나 공정사회에 대한 물음 이전에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노동조합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반도체공장에서 꽃다운 나이의 노동자가 스러져가는데도 산업재해를 끈질기게 부정하고 장애인을 취업시키기보다는 과태료로 대신하는 삼성권력이 요지부동일 때 회색인들의 사회는 요지부동이다. 그 누가 유명환 전 장관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삼성이 제공하는 작은 편익에 이끌려 삼성과 거래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자리에 섰을 때 그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겠는가.
미래의 불확실성은 항용 큰소리만 칠 뿐 불성실한 오늘의 핑계가 되곤 한다. 검찰을 비롯한 사정기관과 사법부를 개혁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말은 옳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온 소리다. 로두스 섬에서 공중제비를 잘 뛰었다고 큰소리를 친 허풍쟁이에게 주위 사람들이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아라”라고 말했다는 우화가 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할 일이다.
그래서 말한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오늘 삼성불매운동에 나서지 않는 진보정치는 사기에 가까운 회색이며, 오늘 삼성불매운동에 나서지 않는 노동조합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부정당하면서 대응 못하는 어리석은 회색이다. 인권이나 진보를 말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언론도 회색이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