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3’ 가운데 누가 당권을 잡아도 민주당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손학규 체제가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2010.10.15 00:04:41
민주당 전당대회 결과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사실 그 뒤숭숭함은 전당대회 이전부터 있었다. 이른바 ‘빅3’로 불리는 이들 가운데 누가 당권을 잡아도 이 당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손학규 체제의 출범이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이런 안도감은, 이 난을 통해 민주당의 ‘좌향 앞으로!’를 거듭 촉구했던 것과 어긋난다는 반박을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민주당 안의 세력 분포를 볼 때, 그리고 그 세력들을 대표하는 출마자들을 놓고 볼 때, ‘손학규 민주당’에는 최소한의 희망이 있다.
정세균이 당대표로서 지난 두 해 동안 보여온 행태를 볼 때, 그에게 새로운 민주당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정치인의 첫 번째 자질인 권력의지는 보여주었지만, 그 권력의지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당 안팎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냈다. 게다가 선거 과정에서도, 그는 자신이 이끌어왔고 이끌고자 하는 정당이 한나라당과 어떻게 다를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지닌 정치적 자산이라고는 노무현의 후광이 거의 전부일 텐데, 그것까지 그가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에서 대뜸 떠올리는 정치인은 유시민이나 안희정이지, 정세균이 아니다.
정동영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담대한 진보’라는 구호로 기존 당권파나 한나라당과의 이념적 차이를 또렷이 했다. 자신의 정치 이력에 대한 ‘반성문’도 썼다. 그러나 그런 때깔 나는 구호나 반성문으로 가리기에는 그간 그의 정치 행태가 너무 좀스러웠다. 총선 패배 뒤 미국에 잠시 들렀다가 자신의 서울 지역구를 버리고 전주로 내려가 보궐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 예다. 정동영의 ‘좀스러움’이 거기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가 여대야소 국회의 여당 의장이었을 때 그 정당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되돌아보자. 그는 노무현 탄핵의 반동에 힘입어 당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얻자마자, ‘실용주의’ 어쩌고 하는 수사로 ‘변화’의 동력을 없애버렸다. 나는 아무리 자기최면을 걸려 해도, 정동영과 ‘담대한 진보’를 포갤 수 없다.
공정해지려면,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로서 지닌 흠이 두 정씨의 흠보다 더 크다고 해야 할 게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나라당 출신이고, 그래서 ‘개혁’이든 ‘진보’든 민주당의 해묵은 라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그는 ‘진보주의자’로 전향한 정동영의 집요한 이데올로기적 심문을, 이념적 갈라치기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피해갔다. 그러나 당권 선거에서 흩날렸던 진보의 구호가 진지한 것이라면, 민주당의 집단지도체제에서 지도부는 그들의 수장을 진보 노선으로 견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실제든 착시든, 손학규는 민주당이 걸친 ‘새옷’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는 적어도 두 정씨보다는, 유권자들을 민주당으로 끌어당기는 데 더 유능할 것이다.
천정배를 내심 지지한 이유
민주당의 새 대표로서 내가 내심 지지한 사람은 천정배였다. 민주당의 앞날이나 한국 정치의 앞날에 바람직한 이념적 대위법의 한 선율(구체적으로 ‘제3의 길’에 감염되기 전의 사회민주주의)을 그가 맡을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였다. 그러나 버젓하다 못해 화사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천정배는 자신이 대중 정치인으로서 무능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그것은 천정배 운수(運數)의 한계이면서, 민주당 운수의 한계일 것이다.
세계 체제론의 챔피언으로 군림해온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최근에 쓴 한 칼럼을 “사민주의에 미래가 있을까? 문화적 선호로서는 여전히 유효할지 모르겠지만, 운동으로서는 그렇지 않다”(<프레시안> 2010년 10월5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그런 판단의 한 근거로 지난달 영국노동당의 새 당수로 뽑힌 에드 밀리반드가 정치 관측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중도’ 노선을 재확인한 사실을 들었다. 밀리반드는 당수로 뽑힌 뒤 한 연설에서 “우리는 낡은 생각과 결별하고, 삶에는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기초적 보장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그 기초적 보장 자체가 거의 없는 사회에서도 밀리반드의 말이 옳을까? 나는 밀리반드의 말이 영국을 포함한 몇몇 복지 선진국에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민주의 운동의 미래는 없다는 대가(大家)의 비관주의가 틀렸기를 바란다. 민주당은 담대하게 왼쪽으로 가야 한다.
나 역시 정동영의 '담대한 진보' 수사를 믿을 수 없다. 그저 시대적 흐름이 '진보'를 주창하도록 변화되고 있구나 라는 정도로만 읽힐 뿐.
손학규 민주당에 희망을 가져본다라... 민주당은 어떻게든 왼쪽으로 가긴 가겠지. 2012년 대선과 총선을 앞둔 요즘, '진보'가 시대적 대세라니까. 그나마 그걸 희망적이라 봐야 하는걸까?
정작 진보를 태생으로 하고 있음에도 전혀 대중적 지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