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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4P 2017. 10. 13. 15:10

  "잠깐만요!"


  영롱한 목소리와 함께 쓰러진 노인을 부축해 안고 있던 흑건단발의 여인이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린이었다. 린의 목소리는 그 평범한 생김과는 달리 옥쟁반에 은구슬이 구르는 듯 듣기 좋았다.


  "다른 건 다 이해가 되는데, 딱 한 가지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네요."


  르노가 멀뚱한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누구신가?"


  "난... 이 학교 역사 교사예요. 그리고 이 분, "


  린이 쓰러져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런데? 뭐가 이해가 안되시나?"


  "우리 마을은, 아니 우리 롱라입은 재개발같은 걸 할 이유가 없는 곳이예요, 잘 아시겠지만. 아~ 물론 재개발을 하면 발주사나 시공업체들에겐 막대한 이익이 발생하겠죠. 그런데 말이죠... 그것도 분양이 잘 된다는 보장이 있을 때 그런 거 아닌가요? 요즘같은 시기에 이런 시골 마을에 누가 와서 산다고 재개발을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더라구요. 일단 하고 보겠다? 분양이 안돼도 그 손실은 어차피 주민들이 감당하는 거니까 뭐 어쨌든 좋다...?"


  교단 앞까지 천천히 걸어나오며 끼어들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이어가는 린의 자문자답식 말에 르노가 약간 당황했다.


  "이... 이봐, 여선생! 무슨 소릴 하는거야?"


  "아니, 아니예요... 뭔가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지 않고서는 별 이익도 나지 않을 이런 재개발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단 말이죠. 가련한 우리 롱라입 주민들을 불쌍히 여기신 저~ 트리문 상회의 회주님 같은 어떤 돈 많으신 부자분이 우리 마을 복지사업에 갑, 자, 기, 관심이 생겨난 것도 아닐테니 말이죠. 주민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런 말도 안되는 주민 의사 무시행위도 하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암... 그렇지."

  "맞어. 그래 그래!"


  교단 앞에 서서 장내를 둘러보며 조리있게 이어가는 린의 말에 중인들이 웅성웅성 끄덕이며 동조했다.


  기곤휘(基袞輝)라는 신비인이 당대 회주(會主)로 있는 트리문Trimoon 상회는 대륙 최고 선진국인 미레나스Mirenas에서도 가장 크고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륙제일상회(大陸第一商會)로, 병장기부터 화약, 식료품, 의복, 심지어 건축, 기관진식(機關陳式)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는 사업이 없었고 손댄 사업마다 성공하지 않은 사업 또한 없었다. [트리문에서 시작해서 트리문으로 끝난다]는 말처럼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트리문의 상표가 붙은 옷을 입고 트리문에서 만든 음식을 먹고, 트리문에서 만든 차를 타고 다니며, 트리문에서 만든 건물에서 트리문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르노는 린의 입에서 트리문이란 단어가 나오자 일순간 흠칫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얼굴에 가소로운 비웃음을 물었다.

  

  "그래. 말 한 번 잘했네. 댁 말대로 어느 눈먼 대상회에서 당신네 롱라입을 위해 선심 좀 쓰자는 걸 수도 있겠지...... 왜? 그게 싫어?"


  "당신도 하청받아 하는 일이라 잘 모른다쳐도, 세상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될 리가 없다는 것쯤은 당신이 더 잘 아실테니 소모적인 입씨름은 그만 두죠. 대체 꿍꿍이가 뭐죠? 왜 굳이 우리같은 시골 마을을 재개발 대상지로 선정한건가요? 아는 만큼이라도 속 시원히 얘기좀 해봐요."


  "그래, 맞어. 우리도 그게 궁금했어."

  "맞네, 맞어. 워따메 그 처자, 속 시원허니 말 한번 잘 허네이. 선상님이라 긍가..."


  장내 분위기가 슬슬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달은 르노는 원활한 일의 진행을 위해 손을 쓰기로 결심한 듯 목을 좌우로 꺾어 두둑, 두둑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아... 이거, 꿍꿍인지 속셈인지 그런 건 난 모르고... 아까 충분히 이번 사업에 대해 설명해줬잖아! 그게 다다. 당신네들 요청으로 콘테이너 가건물 지어서 임시 거주지까지 만들어 주겠다는 게 오늘 설명회의 요점이고. 더 이상 대체 뭐가 불만인거야? 응?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좋게좋게 서명하고 끝내도록 하시자고들, 응? 확 다 아작내버리기 전에!"


  "흥! 이미 늦었어요! 이런 일을 공갈 협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생각하나보죠? 당신들, 대체 정체가 뭐죠? 책임자 불러오세요!"


  "아, 보자보자 하니까 이년이! 내가 책임자다, 응? 뭐? 뭐? 어쩌게?"


  르노가 버럭 화를 내며 성큼 린에게로 다가들며 왼손으로 멱살을 틀어쥐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 쬐끄만 계집년이 뭐? 책임자? 공갈 협박~? 허, 참. 할애비나 손녀년이나... 어디 공갈 협박 한 번 제대로 해볼까? 팍 씨! 말로 할 때 쳐 들을 것이지..."


  키가 170cm에 조금 못 미치는 린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 건장한 체격의 르노에게 멱살이 잡혀 들리자 발뒤꿈치가 절반쯤 들려 숨이 컥 막혔다. 게다가 사내가 곧 막대기로 내려칠 듯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린의 안색에 별반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거... 놓으...시죠.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목 부분이 잡혀 제대로 발성이 되지는 않았으나 또렷하게 들리는 말. 이 상황이 되고서도 겁을 먹거나 당황하지 않는 린의 태도에 놀랐는지 르노의 눈에 잠시 이채가 떠올랐으나 이내 사나운 표정으로 변하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후회? 흐흐... 갈수록 가관이군! 후회를 누가 하나 어디 한 번 보자. 난 여자라 봐주고 그런거 없어! 본보기로 일단 좀 쳐 맞고 시작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린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지는 막대기.


  휙~ 퍼억!

  

  "꺄악~!"

  "아앗! 안돼~!"


  상황을 지켜보던 중인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뒤로 튕겨 나간 것은 린이 아니라 막대기를 내리치던 사내, 르노였다. 막대가 내리쳐지던 그 짧은 순간, 두 팔을 교차해 올리면서 르노의 멱살 틀어쥔 왼손을 위로 튕겨냄과 동시에 발을 들어 르노의 아랫배를 걷어찼던 것이다.


  비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별 타격을 입지는 않은 듯한 르노.


  "으음... 뭔가 한 수가 있는 년이다 이거지? 그렇지만, 그래봤자다!"


  애송이 계집의 의외의 일격에 당하긴 했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의 조직 일심회(一心會) 회원들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일반 동네 무술도장(武術道場) 가서 배운 호신무예같은 건 무예 취급조차 하지 않는, 제대로 배운 진짜 워리어Warrior들이었다. 상부조직에서 파견나온 특별무술사범, 즉 특무사범으로부터 내가기공을 바탕으로 한 제대로 된 무공(武功)을 전수받고 수년 간 이를 악물고 갈고 닦아, 날고 긴다는 유수(有數)한 실력자들의 경쟁을 꺾고 조직 내 서열 3위에까지 이른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르노는 철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데리고 온 부하들은 자신의 조직원들 중에서도 썩 믿을만한 인재들이었다. 한 걸음 더 물러서며 신호를 보내자 장내에 있던 흑의사내들 중 네 명이 린에게로 달려들어 삽시간에 린은 전후사방이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적당히 주물러 줘라. 그리고... 계집! 넌 다른 자리에서 만났으면 껍데기 홀라당 벗겨 한바퀴 돌렸을텐데, 이 정도는 운 좋은 줄 알아라. 흐흐..."


  아직도 은은한 통증이 남아 있는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르노가 이를 드러내고 이죽거리고 나자 린의 전면에 서 있던 아까 춘삼이라 불렸던 사내가 린을 향해 불쑥 주먹을 날렸다. 어떤 예고도,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갑자기 내뻗은 주먹이었는데 놀랍도록 빠르고 정확했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린의 얼굴에 춘삼의 주먹이 꽂히려는 찰나,


  휘익~


  '응?'


  춘삼은 주먹에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의아해했다. 분명 제대로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그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무언가 희끗한 것이 눈 앞을 스쳐간다 싶더니 춘삼의 뒷목에 의식을 잃을 정도로 거센 충격이 가해졌던 것이다.


  콰당~!


  린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춘삼이 혼자 주먹을 내뻗더니 혼자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진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에 맞지 않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갑자기 펼쳐지자 앉아있던 주민들 중에서 킥, 하는 억눌린 웃음까지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 르노는 정확히 보았다. 춘삼의 주먹이 린의 얼굴에 닿기 직전 린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춘삼의 내뻗은 팔 옆을 흐르듯 스쳐 지나가 춘삼의 오른편 몸 뒤편까지 가더니 왼손날로 뒷목을 가격하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아니! 저건?'


  르노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시선이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저 몸놀림이라니! 작고 통통한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도 일반인이! 설마 저 여자도 무공을...? 믿을 수 없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가 놀라 말을 잊고 주춤하고 있는 잠깐의 사이에 각각 린의 왼쪽과 뒤편에 있던 또다른 사내 둘이 한꺼번에 덤벼들다가 역시 똑같이 한 방씩 얻어맞고 고꾸라지고 있었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꺄악~!"

  "아아악!"


  그 새 장내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책상 밑으로 숨는 사람, 멍하니 일어선 채 싸움의 현장을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 교단 좌우와 강의실 뒤쪽으로 나 있는 출입구 쪽으로 우루루 몰려나가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야, 다 물러서! 거기, 비호!"


  르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며 누군가를 불렀다. 빠르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중에도 있었다. 멀리 강의실 뒤편에 팔짱을 끼고 서서 장내의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사내 하나가 르노의 호출에 인상을 찡그리며 팔짱을 서서히 풀었다. 인상을 찡그린 것은 이깟 일로 자신까지 부르냐는 식의 조금은 소극적인, 그다운 반항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내, 비호(飛虎)는 명목상으로는 르노의 부하였지만 실상은 보조 겸 감시 겸 상부조직에서 파견나온 외인(外人)으로 르노보다 오히려 더 강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심과는 달리 팔짱을 푼 비호의 기도(氣道)가 날카롭게 달라지는가 싶더니, 번쩍! 섬광과 함께 어느새 비호의 몸은 공중으로 도약하여 마지막 남은 사내 하나의 공격을 피해 왼쪽으로 우회하고 있는 린의 머리 위로 닥쳐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단숨에 십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약해 온 것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속도!

  

  "히익!"


 막 네 번째 사내의 목을 수도로 내리치려는 순간 무언가 시꺼먼 것이 자신의 왼쪽 공중에서부터 덮쳐오는 것을 느낀 린은 급히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시며 공격하기 위해 내뻗던 손을 움츠리면서 곧바로 허리를 뒤로 꺾었다.


  찌익~!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해 왼쪽 어깨죽지가 길게 찢겨 나가며 선혈이 솟구쳤다. 휘청거리며 신형을 안정시키고 있는 린의 옆으로 내려선 비호의 양 손에는 세 가닥 날카로운 단검이 솟아나와 있는 장갑, 비호조(飛虎爪)가 끼워져 있었는데 그 중 오른손의 단검 두 개에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으윽! 가녀린 아녀자에게 그런 흉기를 휘두르다니! 정말 심하군요!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인가요?"


  흑의사내들의 수준을 어느 정도 예상했고 실제로도 딱 그 정도 수준이라 방심했지만 이번 비호의 공격은 몹시 당황스럽게도 예상 밖이었다. 할아버지와 수부쿤을 쉽게 제압하는 사내, 춘삼의 몸동작을 보면서 이들이 어중이 떠중이 일반 폭력배가 아님은 알았지만 딱 그 정도, 일반 수준을 간신히 넘은 정도뿐임을 조금 전의 드잡이질을 통해 확인했다 생각했는데, 지금의 사내는 그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내는 급이 달랐다. 적어도 자신과 비슷하거나 반 수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내였다. 어찌 이런 사내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그런 실력을 가진 사내가 대체 왜 저런 하급 조폭 사내들과 함께 어울려 다닐 수가...?


  의문을 길게 가질 틈은 없었다. 바닥에 내려선 비호가 일언반구도 없이 살기를 풀풀 풍기며 다시 몸을 날려왔기 때문이었다.


  휙, 휘익,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음을 일으키며 비호의 양 손이 쉴 새 없이 린의 전신을 난자할 듯 짓쳐들어왔는데 다행히 린은 아슬아슬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그 공격들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둘 모두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흉험한 분위기만 느껴질 뿐 실제로는 그저 희뿌연 형상으로만 겨우 뭉개져 보인 반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 르노의 눈에는 둘의 움직임이 제법 선명하게 포착되고 있었다. 르노는 이 순간 진정 감탄했다.


  '대단하군! 비호는 나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한 녀석인데... 역시 저년,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그러나 감탄하고만 있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 마지막으로 쓰러졌던 노인마저 누군가 부축해 나가 버리고 장내에는 그들과 저 여인뿐이었으니 오늘의 자리는 이미 파탄나 버린 것이었다. 다시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또다시 귀찮은 가가호호 방문 협박을 진행해야 했는데 오늘 이런 모습까지 보였으니 이제 경각심을 가진 주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지 뒷골이 은근히 아파오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저 자그마한 여자, 린에 대해 불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상황을 이렇게 망쳐버린 장본인 아닌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요절을 내버리고야 말리라 마음먹고 으드득 이를 갈며 비호와 공방을 벌이고 있는 린을 노려보았다.


  그 사이 비호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똥씹은 얼굴이 되어 있었는데, 줄곧 공격을 하고는 있었으나 계속 헛손질만 하고 있었던 듯 린의 몸에는 처음 어깨의 상처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어떤 상처도 추가되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 공격이란 맞지 않고 빗나가면 기력의 소모가 더 큰 법. 비호는 잠깐 사이에 많이 지쳐보였다. 비호가 어떤 인물인지 지금껏 봐왔던 사람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비호로 안된다면 르노 자신이 합세해서라도 꼭 제압해야 했으니.


  한편 비호의 공격을 계속 피하기만 하고 있던 린으로서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만큼 답답한 상황이었다. 비록 어깨에 입은 상처로 왼팔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상처에서도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의 실력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음이 확실한데 끝도 없이 연달아 이어져 오는 공격이 몹시 날카롭고 거세어 어떻게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을 때는 선공의 묘를 살리면 쉽게 승기를 잡을 수 있고, 반대로 선공을 놓치면 상황을 돌이키기 어려워진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이들 모두를 혼자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어 섣불리 나섰던 애초의 자신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 쪽 뒤로 물러서 있던 우두머리 사내도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는 것이, 합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했다. 이런 식으로는 곤란했다. 장내에 남은 주민들도 없으니 일단 목적했던 바는 이루었다 할 수 있었고, 이제는 자신의 몸을 빼내야 했는데 그게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에잇!"


  비호가 공격했던 손을 회수하는 순간의 틈을 타서 린은 바닥을 크게 박차고 뛰어올랐다. 무리하게 동작이 커진 린의 빈 틈을 비호가 놓칠 리 없었다. 그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린의 오른쪽 옆구리를 부욱, 찢고 지나갔나 싶었는데 그 때 이미 린의 왼발은 그의 옆얼굴을 강타하고 있었다.


  꽝~!


  "크악!"


  쿠당탕~!


  그러나, 


  "으음..."


  이대도강(李代桃畺).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원리에 따른 순간의 판단이었다. 한쪽 얼굴이 피떡이 된 채 구석에 쳐박혀 꿈틀거리고 있는 비호를 보면 의도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옆구리 상처였다. 3cm 이상의 깊이로 길게 패인 세 줄기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옷을 붉게 물들이고 바닥에까지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지혈이 늦거나 무리하게 되면 위험해질 정도로 생각보다 손해가 컸던 것이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싸우기 힘들었고, 특히 지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는 우두머리 사내를 도저히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왁! 이 빌어먹을 년이!"


  기회를 엿보다 비호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르노는 제 때 협공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질풍처럼 달려들며 막대기를 휘둘렀다. 아까의 장난스런 동작에 비해 엄청난 힘이 실린 놀랍도록 거센 일격이 린의 머리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옆구리 상처에 신경이 분산되어 순간적으로 대응할 타이밍을 놓친 린은 피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막는 순간,


  빠득!


  "아흑...! 아야야야!"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린이 뒤로 튕겨 나가 거꾸로 바닥에 한 바퀴를 구른 뒤에야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대번에 오른팔이 부러져 덜렁거렸다.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의 반동을 이용해 급히 몸을 뒤로 날리지 않았다면 팔이 부러지는 선에서만 끝나지는 않았을 위력이었다. 찰나의 기지(機智)가 발휘되어 위기를 벗어난 린.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암담해져 가고 있었다.


  "야! 저년 도망 못가게 뒤를 틀어 막아! 오늘 피 한 번 제대로 보자. 퉷!"


 왼팔에 이어 오른팔까지 부상을 당한 상황. 게다가 이제 자신의 퇴로를 막아선 남은 흑의사내들 넷까지 합해 오대 일. 손에 침을 묻혀가며 막대기를 고쳐쥔 채 제대로 전의를 다지고 있는 우두머리 사내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아아.. 이거 상황이 어렵게 된 것 같네요? 좀 봐주시면 안되...겠죠? 헤헤... 그럼 살살 부탁해요."


  간신히 움직여지는 왼손을 들어 르노를 향해 까딱까딱하며 도발을 하는 린. 이 상황에서는 좀 버겁더라도 우두머리를 먼저 쳐야 일말의 기회라도 있다! 강자를 남겨두고 약한 다수와 먼저 싸우게 된다면 결국 지쳐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린의 도발이었다. 


  "네 년이 어디서 그런 기묘한 무술을 배웠는지 제법 놀랍고도 인상적이었다만 흐흐... 이제 끝이다! 잡아!"


  바로 달려들 듯 하다가 의외로 부하들을 시켜 먼저 공격하게 하는 르노. 보기보다 더 용의주도한 사내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흑의사내 넷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퍽, 휘익, 퍼퍼억!, 꽈당~!


  지금 상황에서 한두 명이면 모를까 무공을 익힌 사내 넷은 무리였다. 앞서 다른 사내들과의 싸움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인지 한결 신중한, 그러나 더 재빠른 동작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사내들. 왼쪽 뒤로 접근하는 한 사내를 왼발 뒤차기로 날리자마자 그 반동으로 몸을 틀면서 반대편으로 접근하는 사내를 오른발로 교차해서 다시 올려찼는데 연이은 부상으로 집중력이 떨어져 그만 허공을 차고 말았다. 그 순간 나머지 두 사내가 휘두른 주먹에 연달아 복부와 턱을 얻어맞고 나가 떨어지는 린. 타격의 순간 몸을 틀어 빗겨맞지 않았으면 그대로 황천길로 직행할 뻔 했다. 다행히 시야가 흔들리고 구역질이 날 만큼 어지럽긴 해도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어서기 위해 땅에 짚은 왼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떨렸고 다친 오른팔로는 옆구리를 눌러 피가 덜 흐르도록 간신히 막고 있는 게 한계였다. 바닥을 짚고 일어서기도 힘든 상황.


  '이렇게 끝인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인데...' 


  쓰러졌던 린이 다시 일어서려는 조짐을 보이자 상황이 끝났다 생각하고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사내들이 재차 달려들었다.


  "어딜 일어서, 이년아!"


  달려드는 기세로 먼저 한 사내가 막 발로 걷어차려는 순간,


  번쩍!


  "크앗!"

  "켁! 끅! 끄윽!"


  번개가 치는 듯한 섬광과 함께 발차기를 시도하던 사내가 급히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옆에 같이 달려들던 다른 세 사내들 역시 거의 동시에 목을 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들의 움켜쥔 손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죽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쓰러져서 버둥거리는 것을 보면 다시 일어나 싸우기는 어려울 듯 싶었다. 그 광경을 본 르노는 다시 한 번 눈이 빠질 듯 놀라 공격하는 것도 잊고 멍청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번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히 상대하고 있던 여인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날 힘도 제대로 없어 보이는데, 설마 누가? 여기 있는 사람 말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무슨 수로?


  그 때 르노는 보았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장내를 선회하여 서서히 여인쪽으로 날아들고 있는 어떤 것을! 회전하는 속도가 느려지자 그 물체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길이 약 25cm 정도의 녹색 빛이 흐르는 시커먼 단검(短剣)같았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니 수리검(手裏劍)처럼 양쪽 방향으로 날이 모두 서 있고 검신에 날카로운 돌기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돋아나 있는데다 부메랑처럼 양쪽 끝이 서로 반대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어 회전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물체였다. 어떻게 새도 아닌 물건이 날개달린 것처럼 공중을 저리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순간 그 물체가 부르르 떨리더니 여인의 1m 정도 앞에서 힘을 잃고 바닥에 쨍그랑, 하며 툭 떨어졌다. 가만히 보니 그 물체는 조금 전까지 여인의 머리 뒤에 달려있던 장식과 비슷해보였는데 아니나다를까, 지금 여인의 머리에는 그 장식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제서야 르노는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챘다.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로만 들어봤지만, 틀림없이 그것이었다!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 손도 쓰지 않고 물건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사람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잡아두거나 공중으로 집어던질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심장을 쥐어짜 터뜨려버릴 수도 있다는 바로 그 공포스런 능력! 여인은 초능력자였던 것이다!


 "헉... 헉... 헉..."


  한 편, 바닥에 왼손을 짚고 있던 린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 흑룡잠패(黑龍佩)를 날리긴 했지만 정말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달려들던 사내들을 모두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애를 써도 잘 되지 않더니 이런 상황에 와서야 뜻대로 제어가 되다니! 절체절명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시도한 것이 다행히 먹혀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적당히 힘조절까지 제대로 되어서 확실히 제압은 하되 치명상은 입히지 않을 정도로만, 의도한 대로 완벽하게 제어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끝까지 힘이 이어지지 않아 마지막에 떨어뜨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무리하게 남은 기력을 다 써버려 일어서기는 커녕 손을 뻗어 흑룡잠패, 흑패를 회수할 힘도 없었다. 상대는 마지막 한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너, 너, 너는 뭐냐? 뭐하는 년이길래 그런...!!"


  그 때, 르노가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 린에게는 다행히도 르노는 그녀의 그런 상태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남은 부하들까지 한 순간에 쓰러뜨려 버린 알 수 없는 그 능력에 덜컥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초능력에, 그리고 초능력자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이나 경외감과 공포를 심하게 느껴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할 정신이 없었다. 눈치라면 누구보다 빠른 린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헉... 헉... 헤헤... 이것까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보여드려요? 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얍~!"


  린이 억지로 왼손을 들어올려 앞에 떨어진 흑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실 흑패를 움직이게 하는 데는 손을 뻗고 어쩌고 할 필요없이 정신을 집중하고 기만 모아서 방출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건 순전히 극적인 효과를 노린 계산된 동작이었다.


  부르르... 들썩,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까의 그 새까만 물체가 여인의 손짓에 따라 부르르 떨리더니 다시 불쑥 하늘로 몇 센티미터 가량 솟아오르는 모습을 본 르노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더이상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부리나케 뒤로 돌아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끄아아아...!"


  챙그랑...


  흑패는 몇 센티미터 이상 솟아오르지 못하고 다시 힘을 잃고 떨어져버렸지만 이미 달아난 르노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아까 부하들을 먼저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용의주도함 뒤에 숨은 소심한 면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럴 정도까지인지는 몰랐다. 제 아무리 자기 부하들이 모두 쓰러지고 혼자 남아 더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게 되었기로서니 저렇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가다니... 초능력이라는 미지의 힘에 대한 과도한 공포감이 아니었다면 다시 있기 힘들었을, 맥빠지는 상황.


  "헉... 헉..."


  그러나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상처도 상처지만, 르노가 도망가다 말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이번에는 정말 끝장이었다. 그 전에 빨리 몸을 피해야 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겨우겨우 억지로 일으켜 세운 린은 흑룡잠패를 집어들고 비틀거리며 강의실 문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지나간 뒤로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 자국이 그 궤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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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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