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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4P 2017. 10. 16. 18:20



흑룡잠패(黑龍簪佩) - 녹색빛이 흐르는 25cm 길이의 흑색 쌍날검. 일명 흑패라고도 하며, 평상시에는 흑풍주의 뒷머리 부분에 부착되어있는 약간 특이한 모양의 밋밋한 장식으로 보일 뿐이지만 일단 흑풍주로부터 분리되고 사용자의 기를 흡수하여 검신 여기저기에 숨어있던 날카로운 이빨들을 드러내게 되면 전후좌우 사방 10m 이내에서는 그 무엇이라도, 심지어 금강석이라 할 지라도 단숨에 조각내어 버릴 만큼의 놀라운 예리함을 뿜어내는 가공할 병기였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병기. 흑풍무후의 독문병기였으나 최후의 전투 혹은 그 이전에 파괴된 것으로 알려짐.


  - 열월사협 전기(熱月四俠 傳記) 제1권, 흑풍주의 주인 열월무후 편에서 발췌


  장일후(張一侯).


  불타는 듯한 적발(赤髮)과 빨간 눈동자의 특징적인 용모를 가진 그는 오늘도 친우 피터(Peter)와 함께 새벽 공기를 마시며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컴컴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이래 지난 십수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하고 있는 일상. 다른 지방엔 매서운 추위가 한창인 2월 새벽이었지만, 이곳은 그저 약간 쌀쌀할 정도의 날씨.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가득한 바닷가 도로변을 달리면서 틈틈이 목검을 앞으로 또는 옆으로 내지르고 있는 그의 곁에는 피터가 하늘색 장발을 휘날리며 짧게 호흡을 끊어 내쉬면서 허공을 향해 연신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훗, 훗, 후훗, 훗!"


  피터는 장일후보다 두 살 위였지만 둘은 나이를 떠나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죽마고우였다. 그는 원래 고아였는데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나이에 그의 사부이자 장일후의 아버지인 장사풍(張四楓)에게 거두어져 장일후와 함께 배우고 자란 사이로,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함께 살고 있는, 그야말로 한가족이었다. 비록 성장한 후에는 각자 서로 다른 직장을 구해 나간 관계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긴 했지만 하루 중 이 새벽 시간만큼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함께 달리며 함께 수련했다.


  늘 둘이 붙어다니며 이웃의 힘들고 어려운 일을 보면 제 일인 양 나서서 돕고 힘쓰는 그들을 일컬어 주위에서는 빨갛고 파란 그들의 머리를 빗대 "태극이인조(太極二人助)"라 불렀다. 그들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은 거친 어부들과 뜨내기 선원들이 많은 바닷가 항구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해서는 범죄나 폭력사건 등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상가(商家)가 있으면 어디에나 있다는 조직폭력배들은 아예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불의한 현장엔 늘 태극이인조가 있었고 그들이 나서서 지금껏 해결되지 않은 일이 단 한 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극이인조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것이 주변 폭력조직들의 현실이었으니 "경찰보다 태극", 이것만큼이나 그들의 명성을 나타내주는 단적인 표현도 없었다.


  하늘색의 머리칼이 인상적인 피터의 주먹이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격할 때마다 공기가 픽, 픽, 소리를 내며 파열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언뜻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가벼운 주먹질에 공기가 순간적으로 압축되었다 터져나간다는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쉬쉬쉬쉿!


  피터의 주먹질 "쑈"에 자극받았는지 지금껏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흐르듯 뻗어가던 장일후의 목검도 어느 순간부터 날카롭게 공기를 잘라내는 소리를 연신 만들어내고 있었다.


  "피터야, 인자 몸 다 풀리가제? 저 앞 터널 근처 공터에 가가 오랜만에 한판 해보까?"


  "으흠... 그라까? 안 그래도 내가 먼저 말할라캤는데, 마, 그라자!"


  호남 남부 억양이 강한 그들의 말투에서 다른 지방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구수함이 물씬 풍겨나왔다.


  잠시 뒤, 사방이 높이 솟은 나무로 둘러싸인 가운데 반경 10미터 정도의 공간만 비어있는, 누가 일부러 만들어놓기라도 한 듯한 공터에 마주 선 둘이 곧 치고 받으며 손속을 나누기 시작했다.


  휙, 휘휙, 휘익~

  쉬쉬쉭~ 쉬쉭~


  환한 대낮이라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엄청난 빠르기의 공방전을 펼치고 있는 둘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단 한 차례도 부딪치는 법 없이 서로 상대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흘려넘기면서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고 있었다. 약속대련이라도 되는 듯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만큼 서로 상대의 공격에 익숙해 있다는 것일까? 한 명은 목검으로, 한 명은 주먹으로 한참을 그렇게 툭탁거리던 어느 순간,


  따앙!


  최초의 부딪침과 함께 둘의 동작이 멎었다. 장일후의 목 바로 앞에 비스듬히 치켜든 목검이 피터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아야야야...!"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있나 싶더니 곧 내질렀던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팔짝팔짝 뛰며 피터가 엄살을 부렸다.


  "와따메... 엄청시리 아프네! 일후, 니 검은 저번에보다 더 날카로워졌데이! 내 무쇠 주먹이 다 아플 정도네!"


  "하하하, 피터 니가 노는 사이에 내가 좀 열심히 갈고 닦았다 아이가!"


  "비겁하구로, 누구는 밥 벌어먹어 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데, 누구는 일은 안하고 맨날 수련만 하제? 이거 영 불공평하데이."


  피터는 인근 항구에서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을 감독하는 항만 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반면에 장일후는 아버지 장사풍이 운영하는 장가무도관(張家武道館)에서 사범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무도관이지 이 시대 무술도장들이 대부분 그렇듯 동네 꼬마들 체력단련이나 호신술 정도만 가르치는 것이 전부인데다 무술이라는 것이 구시대 유물쯤으로 인식되어 인기도 없다보니 그나마도 몇 안되는 도장들도 대부분 명맥만 유지한 채 적자에 허덕이는 실정이었다. 장가무도관은 다행히 최근 몇 년 전부터 태극이인조의 유명세에 힘입어 수련생들 수가 제법되었던 관계로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한 수입은 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야, 나도 마이 바쁘다! 도장에 맨날 붙어있다고 수련할 시간이 잘 나는게 아이다! 얼라들 가르치는 기 쉬운 일인 줄 아나!"


  "됐다, 마. 됐고... 비겁한 일후야, 몸은 대충 다 풀었고 인자 제대로 함 붙어보자이."


  "제대로? 니 그라다 다친데이..."


  "웃기지 말고 니나 조심해라이. 내 요새 주먹에서 번개도 막 튀 나간데이."


  "오~ 번개애애? 그새 뭐 쫌 깨달은 기 있는갑네? 어디 함 구경해보까?"


  농담을 주고받으며 잠시 한숨을 돌리고는 다시 거리를 벌리며 마주서는 두 사람. 조금전에는 내력(內力) 없이 초식으로만 겨뤘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대련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  *  *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숲길. 주변으로 메마른 가지들이, 나무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간다.


  -  어두워... 아직 날이 새지 않은걸까...? 대체 며칠째 쫓기고 있는 것일까...?


  -  이제는 시야가 가물가물해서 사물이 잘 구분되지도 않아... 그저 쓰러져 쉬고 싶어.


  - 저 멀리... 거무스름한 빛으로 출렁이고 있는 넓은 형체가 바다가 맞는다면... 목표한 곳으로 제대로... 온 것 같긴 한데... 더이상은 뛸 힘이 없어... 그래도... 뛸 수밖에... 뒤에서... 들려오는 저 발소리들은... 나를 쫓아오는 사내들의 것이 틀림... 없을테니까!


  생각마저 드문 드문 끊어질 정도로 린의 몸과 마음은 모두 극도로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그냥 떠날 수도 없었고, 길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친딸이나 친손녀처럼 돌봐준 집 주인 할아버지의 상태도 걱정되어 집에 잠깐만 들렀다 떠난다는 것이 그만 몸져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그 곁에서 병수발 드느라 잠시만 잠시만 하면서 다음날 해가 뜨도록 떠나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자신의 핏자국을 따라 추격해 온 예의 그 흑의사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아직 제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들의 목표는 자신, 할아버지의 성화에 등떠밀려 황급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어찌어찌 동진강을 건너고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줄곧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높다란 갈대숲 등으로만 쌓인 눈을 헤쳐가며 피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충분히 따돌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만 발길을 늦추면 어찌 알고 찾아오는지 금세, 혹은 길어도 채 한 두 시간도 되지 않아 기가 막히게 바짝 쫓아오거나 오히려 앞길을 가로막고 덤벼드는 사내들. 먼 과거 신화시대에는 천리추종향 같은 것이 있어 동물을 이용해서 추적하는 방법이 있다는 전설같은 얘기는 들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것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대체 어떻게 추적해오는 것일까?


 "헉... 헉... 헉..."


  남쪽으로 많이 내려와서인지 이젠 새벽임에도 기온이 제법 높았지만 여전히 하얀 입김은 깜깜한 새벽 어둠을 뚫고 선명하게 보일 만큼 뿜어져 나왔다. 멀리 새벽 별빛에 일렁이는 바다와 그 앞으로 나지막한 인가의 불빛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한 야트막한 산길을 비척비척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면서도 용케 중심을 잃지 않고 달리고 있는 린.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에 흠뻑 젖은 진청색의 운동복 옆구리에서는 벌겋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응급처치도 하고 옷도 갈아 입었지만 지난 며칠간 흑의사내들의 추격을 미처 따돌리지 못하고 간간이 벌어진 격투로 인해 다시 벌어진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상처도 상처지만 문제는 극도로 지친 몸 상태.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음에도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추격자들이 어느새 뒤를 바짝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 백여 미터 후방 산길에는 흑의정장을 대충 걸친 건장한 사내들 네 명이 빠른 걸음으로 추격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르노였다.


  [칙... 칙... 예! 현재 계신 위치로부터 전방, 칙... 약 120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칙...]


  르노가 팔목에 찬 휴대폰으로부터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세계의 휴대폰은 단거리는 직접 통신, 장거리인 경우는 모두 지구 주위를 빽빽히 둘러싸고 돌고 있는 인공위성을 통해 통신을 하는 방식으로 3차원 홀로그램 입체영상 통화가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르노처럼 음성전용 통신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았다. 대재앙을 겪으며 지상의 대부분 통신 기반시설물들이 파괴되거나 무용지물이 된 이후 새로 재건하면서는 지상에 통신 시설물들을 새로 만들기보다 안전하고 효율좋은 위성을 이용한 방식으로 발전해 결국 위성 통신이 주를 이루게 됐는데 그 유일한 단점으로 간혹 지역이나 계절, 기상 상황에 따라 이처럼 잡음이 끼거나 통신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도 며칠 전에 미레나스 전역에 내린 폭설이 방해가 된 것인지 통화상태가 썩 좋지 않아 잡음이 심하게 들리고 있었다.


  "하... 끈질긴 년! 어떻게 쫓아도 쫓아도 끝이 없나 그래. 그래도 이만큼 좁혔으니 이제 금방 잡을 수 있겠군!"


  [칙... 빨리 따라잡으시는 게 좋으실겁니다. 칙... 3분 뒤부터 약 45분간 그 지역은 위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치칙...]


  "응? 뭐? 또? 아... 그거 참, 비싼 돈 주고 쓰는 위성이 뭐 맨날 그따위냐! 사갈 너 이 자식! 똑바로 못해?"


  르노는 짜증이 솟구쳐 입밖으로 더 심한 욕설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제도 그놈의 위성을 한 시간 가까이나 사용할 수 없게 되는 통에 여자의 종적을 놓쳐 다시 찾느라 하루를 꼬박 써야 했다. 상부조직까지 손을 뻗치고도 거금을 들여 어렵게 구한 호남 지역 위성망과 자기 조직 내 최고 정보 요원인 사갈(蛇蝎)이면 금방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다행인 것은 저 여자는 위성으로 추적 중인 것을 모르는지 인적이 드문 곳만 골라서 다니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위성과 적외선을 이용한 추적을 더 용이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진행방향을 따져보고 최대한으로 가능한 예상 도주경로를 뽑아서 전송해줘봐! 그리고, 목적지는 대체 어디쯤인 것 같냐?"


  [칙... 예... 치칙... 그게 계속 바뀌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칙... 지금 방향으로 봐서는 소프트브룩... 소프트브룩만쪽인 것 같습니다.]


  "제길... 이 추운 겨울에 멀리까지도 왔군. 호남땅을 완전히 가로질러서 바다까지 오다니!"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여자를 지금껏 못 잡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자동차를 타고 갈 수가 없는 곳으로만 다닌다는 점이었다. 빠른 기동성을 위해 비싼 돈 들여 장만한 마나듐 고속 승합차도 이럴 때는 무용지물. 자동차로 갈 수 있는 포장된 도로였으면 벌써 추격은 백 번도 더 끝났을텐데 교묘하게도 길이 없는 곳으로만, 그것도 예측하기 어려운 동선을 보이며 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뻔히 있는 위치는 알았지만 정작 잡기 위해서는 자신들도 직접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를 나누어 중간중간 큰 길이 나오면 차량을 대기시켜놓고 임무를 교대해가며 한 조는 쉬고 한 조는 추적, 나머지 한 조는 주변 예상 진행방향 근처 도로에서 미리 대기하는 식으로 쫓고 있으니 이만큼이라도 쫓아왔지, 그렇지 않았으면 예전에 놓치고 말았을 정도로 날쌔고 교묘하게,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도주하고 있는 여자였다.


  부상당해 입원시킨 부하들 아홉을 빼고 동원 가능한 나머지 자기 서열 이하 일심회 조직원을 열 다섯이나 동원하고도 그깟 여자 하나 못 잡는다면 지금껏 쌓아온 자신의 이름에, 그리고 나아가 자기가 속한 조직의 이름에 먹칠을 할 일이라, 애시당초 시도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쫓기로 결정한 순간부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했다. 그래서 잡아봤자 큰 의미도 없는 여자 하나 잡으려고 돈이며 인력이며 아끼지 않고 총동원했던 것인데 이제야 거의 잡을 수 있을 만큼 근접하게 되었다. 더 적은 인원으로 조를 많이 나눠서 다양한 방향으로 추격했으면 더 빨리 잡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상대는 이미 자신의 부하를 아홉이나 쓰러뜨리고도 모자라 다치고 지친 몸으로도 번번이 포위망까지 뚫고 달아난 놀라운 무술실력을 보유한 여자. 게다가 초능력자이기까지! 최소한 서너 명 이상은 있어야, 그것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서 최대한 힘을 빼놓은 다음에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리 지루한 추격전을 절반쯤은 의도적으로 계속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열흘도 더 넘은 이 추격전을 서서히 끝낼 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머지 인원은 차량으로 소프트브룩만쪽 예상 진행 경로 적당한 곳에 먼저 가서 차단하고 있으라고 전달해! 사갈 네가 책임지고! 응? 막판 토끼몰이 한 번 제대로 해보자!"


  [... 칙...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위성 추적 불가시간입니다!]


  잠시 뒤 삐삣, 소리와 함께 르노의 휴대폰 화면으로 소프트브룩만 인근 지형과 여자의 예상 도주 경로가 표시된 지도가 나타났다.


  "... 저 앞에서부턴 외길 도로지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겠군. 오호? 터널도 하나 지나야 되고! 으드득, 계집, 넌 이제 죽었어! 얘들아, 서두르자!"



  *  *  *



  소프트브룩만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는 해안가 산악 도로. 불과 며칠 전에 미레나스 전역에 폭설이 내렸지만 이 남쪽 지방에는 기온이 따스해서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는지 도로 주위에 눈이 쌓였던 흔적마저도 전혀 없었다. 도로를 따라 한쪽은 바다를 면한 낭떠러지였고 다른 한쪽은 높이 솟은 가파른 암벽이라 어디 다른 곳으로는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외길. 그 끝에 산을 관통하는 짧은 터널이 뚫려 있었고 그 터널만 지나면 바로 소프트브룩이었다.


  그 터널 입구 앞에 보통 자동차보다 조금 더 큰 시커먼 색의 마나듐 고속 승합차 세 대가 도로를 막아서는 형태로 봉쇄하고 있었는데 그 앞 도로에서 한 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갈색, 검정색, 금발의 머리 색깔로만 겨우 구분이 가능할 뿐 똑같은 흑의정장을 걸친 비슷비슷한 덩치의, 인상마저 비슷한 사내 칠팔 명이 포위하듯 반원 형태로 둘러선 가운데 역시 같은 흑의정장 차림의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린이었다. 터널을 통과해 가려다 막힌 채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는데, 이전과 다르게 몸놀림조차 몹시 둔해 겨우 두 사내와 싸우면서도 연신 여기저기 얻어맞고 있었다.


  "헉... 헉... 이익...!"


  순간을 노려 뒤돌려 찬 발 뒤꿈치에 덜컥, 한 명이 걸려들었다.


  "끄윽!"


  꽈당!


  금발의 한 사내가 목덜미를 얻어맞고 나자빠지는 사이에 다른 흑발 사내의 발차기가 린의 오른쪽 허벅지를 가격했다.


  퍽!


  "아악!"


  이번 공격은 꽤 강했던지 린의 다리가 반으로 접히며 풀썩 무릎이 꿇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왼팔 팔꿈치로 바짝 다가선 흑발 사내의 명치를 가격하는 린.


  "커헉!"


  배를 움켜쥐고 나동그라지는 사내를 피해 옆으로 재빨리 굴러 일어서고 있는 린에게 이번에는 나머지 사내들 중 세 명이 한 걸음씩 나서 다가섰다. 린이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

 

  "여기까지다. 계집!"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그녀의 뒤쪽에서 그동안 익숙해져 버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다 본 그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금껏 끈질기게 뒤를 쫓아오던 르노를 비롯한 네 명이 뒤에서 나타나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살펴보니 조금 전 쓰러뜨린 사내 둘을 제외하고도 남은 사내들이 도합 13명. 끝내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 잡히고 만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벌써 희뿌옇게 밝아져 있었고, 저 아래로 시커멓게 펼쳐져 있던 바다도 조금씩 환해지며 바알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해가 뜨려하고 있었다.


  "오~ 여기 장소 좋구만? 인적도 없고. 바람도 좋고. 좀 쌀쌀하긴 해도, 응? 흐흐흐... 또 터널도 있고! 응? 이번엔 달아나기 힘들껄? 이제 포기하지?"


  여기까지 쫓느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은 뒤 탁 트인 주위를 둘러보며 르노가 말했다.


  "헉... 헉... 그런... 것 같군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네요. 후우... 후..."


  린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체념어린 말을 내뱉았다.


  "자, 마지막으로 뭐 할 말 없나?"


  "... 있어요. 후우... 후우.. 대체 왜 나를 여기까지... 쫓아온거죠?"


  "응? 그야 당연히 네년이 도망가니까 쫓아왔지 왜 왔겠어?"


  "그게 이렇게나 끈질기게... 후우... 쫓아올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후우... 후..."


  "죽일 년.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우리 일을 망친 것도 모자라서 애들까지 다치게 해놓고, 뭐? 하는 소리 봐라~"


  "그건... 후우... 애초에 당신네들 잘못이었잖아요. 후우... 재개발 사업을.. 후... 그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협박해서.. 후우... 성사시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리고... 후... 나만 쫓을 만큼... 후... 당신네들, 그렇게 한가한가요?"


  서서히 가쁜 숨이 진정되어 가는 린.


  "허, 이년 봐라! 우리 걱정을 다 해주네? 물론 바쁘지! 네년 잡아 조지고 다시 바쁘게 일해야지! 왜? 그렇게 말 좀 길게 하면서 시간 좀 벌어보시게? 핫!"


  퍽! 털썩!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르노의 돌려차기가 린의 얼굴쪽으로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올려 막으려 했으나 부상당한 어깨의 통증 때문에 적절한 반응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어깨 부위를 강타당해 쓰러진 린. 이리저리 말을 주고받으면서 기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해보려 했던 린의 시도가 그대로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악... 으음..."


  쓰러지면서 무심결에 오른손으로 땅을 짚던 린은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의 불같은 통증을 느끼고 신음을 내질렀다. 부러진 오른팔을 옷소매 안으로 간단한 부목을 대고 고정해두긴 했지만 여전히 움직이기는커녕 건들기만 해도 통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방금의 가격으로 일전에 다친 뒤 대충 지혈만 해 둔 왼쪽 어깨의 상처마저 터졌는지 왼쪽 팔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는 텔레키네시스를 쓸 기력조차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더 이상 어떤 다른 수도 없었다. 애초부터 저들의 역량을 잘못 판단한 결과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최악의 순간이었다.


  "야, 뭐해? 보고만 있지 말고 잡아 일으켜 세워봐!"


  앞을 막아서고 있던 흑의사내 세 명이 잽싸게 달려들어 바닥에 쓰러진 린을 붙들었다. 대항할 힘도 없던 린은 그대로 붙잡히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양쪽으로 두 사내가 우악스럽게 팔을 각각 뒤로 비틀어 올려 잡고 나머지 한 사내는 뒤에서 린의 머리채를 잡고 한 팔로 목을 감아 조였다. 이 시대 경찰이 범죄자를 현장 체포할 때 주로 쓰는 삼인일조의 포박기술을 흉내낸 듯 했는데 종종 맞춰본 솜씨인 듯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으윽..."


  린은 부러진 오른팔이 뒤로 다시 꺾이기까지 하자 이가 갈릴 만큼의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그년 머리에 있는 그 장식, 그거부터 떼서 치워라. 그거 전에 보니까 보기보다 무서운... 아니, 재수없는 물건이더라."


  머리채를 잡고 있던 사내가 린의 머리띠 뒷머리에 붙은 장식, 흑룡잠패를 떼어내려고 잡았는데 어떻게 붙어 있는지 힘을 써봐도 떼어내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형님, 이거 안 떼지는데요?"


  "아, 그럼 머리띠를 통째로 벗겨버려!"


  머리띠는 검은 색의 보통 천 종류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무슨 재질인지 손으로 잘 구부려지지도 않았고 머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벗기기도 쉽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리며 씨름을 하고 있자 르노가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는가 싶더니,


  "비켜봐!"


  하고는 다가서서 린의 머리띠를 움켜쥐고는 끙, 하고 용을 썼다.


  뿌지지지... 와그작!


  "악!"


  그의 놀라운 악력(握力)에 머리띠 중간쯤이 통째로 터져나가며 린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린의 이마에서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찢어지는 대신 터져나간 것으로 보아 머리띠는 천 종류가 아니라 합금이나 복합수지 같은 딱딱한 재질인 듯 했다. 떼어낸 머리띠를 길가 수풀쪽으로 가차없이 휙 팽개쳐버리는 르노. 순간 린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르노를 향해 매섭게 돌아왔다.


  "일단, 우리를 이렇게까지 골탕먹인 죄값부터 치러야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막대기로 린의 목덜미며 어깨, 팔, 허리, 배, 허벅지 등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르노.


  퍽! 퍽! 퍽! 퍽! 퍼퍽!


  "아악!! 악! 윽! 윽!... 으..."


  "다시는 반항할 생각이 안나도록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다져주지, 응?"


  르노는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의 인상마저 찌푸려질만큼 잔인하게 사정없이 두들겨 댔다. 얻어맞을 때마다 억눌린 비명을 지르던 린의 비명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더니 어느 순간 더 이상 아무 소리를 내지 않자 그제서야 그는 때리던 손을 멈추고 다가서서 린의 턱을 한 손으로 잡고 치켜 들었다. 의식을 잃고 추욱 늘어져 있다 잠시 정신이 들었는지 간신히 눈을 떴는데 르노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매서웠다. 


  "하? 독한 년, 꽤나 버티는군... 어?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네년 얼굴도 제법 반반하네? 응? 살결도 곱고, 적당히 통통한게 응? 몸도 탄력이 있고. 응? 대충 볼 때하곤 많이 다른데? 그리고... 오오~ 이것봐라?"


  쫘아악!


  "악~! 뭐, 뭐하는...!!!"


  목덜미에서부터 아래로 쭈욱 찢겨버린 진청색 운동복 사이로 린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스포츠 브래지어로 단단히 조이고 있긴 했지만 선명하게 드러난 가슴골과 그 아래로 급격한 굴곡을 형성하고 있는 가슴의 곡선은 미처 그 풍만함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손에 막대기를 쥔 채 린의 브래지어 위로 드러난 젖가슴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르노.


  "오~ 가슴도 탱탱한 게 장난이 아닌데? 그냥 끝장내긴 아까운걸? 흐흐... 먼저 한바탕 돌려, 응? 얘들아, 니들 생각은 어떠냐?"


  "흐흐흐... 맞습니다."

  "그럼요. 아~ 당연하죠. 그냥 보낼 순 없죠."

  "고년 그거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것 같은데, 제법 맛 나겠는데요, 쓰읍."

  "흐흐... 전 뒤쪽이 더 좋습니다. 거기가 더 빡빡하니 좋거든요."

  "아~ 짜식, 지저분하기는! 그럼 나는 입!"

  "아서라 자식아, 확 물기라도 하면 어쩔라고! 으헤헤..."


  주위에 둘러선 채 젖가슴이 반이나 드러난 린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너도나도 음탕한 말을 한마디씩 내뱉던 흑의사내들이 슬슬 몸이 달아오르는지 저마다 뻐근해져 오는 아랫도리를 추슬려 올리거나, 침을 닦거나, 저질스럽게 허리를 튕겨대는 등 난잡한 행동들을 해댔다.


  "이... 이러는 거... 후환이 두렵지... 않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힘을 쥐어짜내어 린이 외쳤다.


  "흐흐흐.. 후환? 뭐? 네까짓 년 하나쯤 어떻게 해버린다고 뭐, 경찰에라도 걸릴까봐? 그깟 경찰... 흐흐... 걔들이 우리 일심회를 건드릴 수나 있을 것 같나? 웃기는군."


  "설마...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요?"


  "하! 고년... 몰랐어? 당연하지! 네년은 오늘부로 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지는거야. 내일이면 네년이 살았었다는 흔적도 없어질꺼다. 왜? 거짓말같나?"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나는... 학교 교사에다... 세금도 내고 있는..."


  "순진한 소리하고 있네, 멍청한 년. 돈과 권력이면 안되는 게 있는 줄 아냐? 흐흐..."


  "돈... 권력... 세상은 역시... 그렇군요..."

  "그래. 우리 일에 쓸 데 없이 끼어들어 훼방놓은 걸 죽기 전에 뼈저리게 후회해라, 멍청한 년아. 그 전에 먼저 천국부터 보여주지. 네년도 그 나이 쳐먹도록 남자 구경도 못해보진 않았을테고. 같이 재미나 좀 보자고, 응? 흐흐흐..."

  르노의 마지막 말에 린이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듯 눈빛을 사납게 번뜩였다. 그러자 비웃음을 흘리고 있던 르노가 갑자기 그녀의 눈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단! 즐거운 시간을 갖기 전에 네년 눈에서 그 독기부터 먼저 좀 빼놔야겠군. 썅, 눈깔에 힘 안 풀어?"


  퍽! 짝! 퍽! 쫘악! 퍼억!


  턱을 쥐고 있던 손으로 린의 뺨을 이리저리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르노. 이내 린의 입과 코에서 피가 터져 흘러나왔다.


  쫘악! 짝! 짝!


  연달아 얻어맞으며 부풀어오르는 눈덩이며 흘러내리는 침과 피로 린의 얼굴은 금세 엉망이 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눈빛은 죽지 않고 르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모진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 계속 얻어맞자 잠시 뒤 그 눈빛이 풀리며 기어이 혼절하고 말았다.


  "어쭈... 이년 이거 독한 것 봐라, 아주 그냥 맛이 갔네? 이대로 그냥 돌려? 아니지... 그럼 재미 없지. 야, 깨워!"


  옆에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자동차로 가더니 생수통을 하나 꺼내들고 와서 마개를 열고는 린의 머리 위에 콸콸 쏟아 부었다.


  "크..윽! 푸..."


  쌀쌀한 날씨에 차가운 물이 퍼부어지자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다시 눈을 뜬 린. 그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주인공인 네년이 자고 있으면 안되지, 응? 야, 터널 안으로 끌고 가서 껍질 홀랑 벗겨 놔!"


  "윽... 이... 이러지... 마세요!"


  르노가 터널쪽으로 고갯질을 하며 린을 결박하고 있는 사내들에게 지시하자 린의 얼굴이 절망과 공포의 빛으로 어두워졌다. 이제부터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끔찍한 시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세 명의 사내들에게 결박당한 채 터널로 질질 끌려가던 바로 그 때,


  털썩, 쿵.


  멀리 터널 입구 앞을 막아선 차량들 옆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주위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부하 둘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 뒤로 낯선 인영(人影) 두 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고 푸른 머리 색을 하고 있는 특이한 용모의 사내들이었다.


  "혀, 형님!"


  린을 끌고 가던 사내 중 하나가 먼저 그것을 발견하고 경호성을 터뜨렸다.


  "뭐냐? 응? 웬 놈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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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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