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19: 시장은 누구의 것인가? - 개마고원 (2001-07) (읽음: 2001-09-19 01:22:53 AM)
- 강준만
- "그간 '시장'과 관련된 논의는 극단적인 '옹호'와 극단적인 '반대'만이 있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시장과 시장논리를 배격·비판하는 주장조차 시장을 통해서 얻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약육강식형 시장논리라 할 수구기득권 세력의 '시장 만능주의'도 문제지만, 시장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는 개혁진보 세력의 '시장 배격주의'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대립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건 당연히 '시장'에서 기득권을 쥔 세력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시장과 시장논리를 악이요 적으로 간주하여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조차 상업주의로 비난함으로써 시장을 수구기득권 세력에게 통째로 넘겨주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이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서만큼이라도 이런 어리석은 게임을 끝내자는 게 저자 강준만의 주장이다. "시장을 수구기득권 세력과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헌납하지 말고 일정 부분 시장을 이용하자!"
물론 이는 무조건 시장(자본주의)을 껴안자는 게 아니다. 어떤 분야와 사안이냐에 따라 시장논리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시장 차별화')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개혁 세력의 투쟁이 현실 공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행위엔 온갖 문화적 '아우라'를 씌워가며 거대 극우매체와의 포옹도 마다않으면서 여전히 시장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이중성이야말로 최소한의 상도덕도 없는 파렴치한 상업주의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시장을 적으로 간주하겠다면 시장을 파렴치하게 이용하는 세력의 가슴에 안기거나 그 등에 타는 행위도 중단하라."
진정 '자본과 함께 살면서도 자본을 넘어설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지식계에서만큼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대한 고루한 시각을 재검토해야 할 때가 아닌가.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
최근 펴낸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공개적으로 적극 지지하는 저자는, 교수들의 정당가입의무화법을 만들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통해 그 동안의 지식인들의 투명하지 않은 밀실거래식 현실 참여 방식을 문제 삼고 있다. 겉으론 무이념·무당파성을 내세우며 특정 정당에 조언을 하는 사회참여적 지식인들의 '밀실 구조'를 타파하고, 정당을 투명한 시장판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밀실의 생리가 그렇듯 밀실에서의 거래는 그 익명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신의 발언과 행위에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성과 아마추어리즘을 낳는다. "한국 정치가 그렇게 개판이라면 정치를 '시장'에서 저주하고 '밀실'에서 껴안는 이중성을 보일 게 아니라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당파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언론개혁' 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 사건은 '언론 길들이기'요 '언론 장악 음모'다? No! 「빅3 언론사들, 생존 위해 정권교체 나설 것」이란 기사에서 보듯, 그렇게 함으로써 정권으로선 치명적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동기의 순수성'이 의심스럽다? No! 권언유착의 구도에서 보자면 이번 사건은 '권'의 내부고발인 셈인데, 그렇게 '권력 대 신문'이라는 '2자 게임'이 아니라 여기다 국민까지 포함시킨 '3자 게임'으로 이 문제를 보면 간단히 정리된다. 그 내부고발로 인해 누가 덕을 보느냐, 즉 국민이 덕을 본다면 '동기의 순수성'이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개혁 상업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상업주의를 혐오하는 문화 때문에 시장 속에서 검증받기보다 개혁 대상인 극우매체와의 평화공존을 통해 이들을 개혁에 이용하겠다는 '기생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학자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는 교수들이 언로(言路)를 장악하고 있어 지식인들은 장식(裝飾)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기득권 보호와 이윤 추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수구세력들처럼 개혁적·진보적 메시지를 널리 전파하는 '개혁 상업주의'를 통해 사상의 자유시장을 열어보려는 노력이 시급히 요청되는 때이다.
'대중적 글쓰기'와 소비 자본주의
소수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글이야말로,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는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는 고정관념은 왜 재생산되고 있는가? 대중적 글쓰기 방식에 선정주의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대중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은 문화적 기득권에 대한 완강한 고수가 아닐까. 대학 교수들이 한국 사회의 언로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Yes24 책소개글)
-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아, 이번엔 상당히 따분한 내용이겠다'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장'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 스스로 대단히 경제적이지 않은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자본, 경제, 시장, 주식, 금융, 투자, 거래, ... 등등과 같은 단어들을 보면 왠지 꺼림칙하고 멀리하게 되었다. 한때는 '정치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해 누구와 이야기해도 별로 꿀릴 것이 없다는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아마도 자본주의에 대한 깊이를 알 수 없는 혐오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 "정치가 아무리 개판이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정치를 살리려고 애쓰는 게 지식인의 책무가 아닐까? 개 같은 현실을 모른 척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편파적인 행위가 아닐까?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비이념, 비정치를 부르짖는 나라에서 재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겠는가?"(p.47,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 : 한국 대학교수들의 정치참여 방식 中)
맞다. 그저 냉소로 일관하면서 세상을 '그저 사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들은 '재미'를 보고 있다!
분노가 진실한, 열정적이었던 내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던가. 왜 그 분노가 냉소로 바뀌게 되었을까. 나는 세상에 무엇을 그리 기대하고 살았을까.
좌절당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의 모습에서 느낀 그 순수한 분노. 이젠 그것이 없어진 것인가...
- "윤평중의 반론에 답한다 : '독설'이 문제인가, '성실성'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 착잡했다.
강준만이 윤평중이라는 거물급 지식인에 의해 잘근잘근, 그것도 불성실한 독해와 왜곡으로 점철된 아주 '정중한' 글로써 씹히면서, 심각한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속에서도 그러한 강교수의 심중이 드문드문 묻어났다.
아... 강준만의 위기로구나... 나는 개인적으로 강준만을 좋아한다. 진중권보다 오히려 강준만을 더 좋아한다. 우스갯소리로 얘기하자면, 나는 '좌'보단 조금더 '우'에 가깝기 때문일까? 이렇게 내가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지지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92년 대선때 김대중을 지지하면서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렇다. 그래서인지 강준만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착잡해진다.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 "글에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가 필자와 독자 사이에 간격을 없앰으로써 글과 삶을 객관적으로 읽고자 하는 이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며 글이 독자에게 감정적으로 밀착해 들어가 글과 독자 사이에 틈을 허용하지 않아 필자의 감정을 독자에게 대리시킴으로써 독자가 이지적이고 반성적으로 글을 읽는 사유공간을 대폭 축소시킬 위험이 크다" (p.340, 글쓰기에서 '감정 드러내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中)
이 대목을 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올랐다. 왜? 그의 글쓰기가 그간 철저히 '나'를 드러낸 글쓰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수많은 '매니아'들을 양산해내고, 동시에 나같은 혐오자도 만들어냈다.
상당히 와 닿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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