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뜬금없는 얘기다. 전후 맥락을 모르니 뜬금없게 받아들여지지만 최근 1~2주 사이에 강준만 교수 주위에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원래 강교수가 소심한 면이 많지만 매주 쓰던 칼럼조차 쓰지 않고 한 주 건너뛴 것을 보면 이번엔 뭔가 큰 일이 단단히 벌어진 모양이다.
뭘까,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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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www.sun4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43
상처는 내 친구
[강준만 칼럼]
2008년 12월 18일 (목) 08:35:53 강준만 kjm@chonbuk.ac.kr
“CEO나 임원들, 오너십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그들도 스스로 상처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죠. 도처에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입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소수자는 소수자대로, 거기다 권력자들조차 자기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죠. 행복의 느낌을 가진 사람은 정말 만나기 어려워요. 정신분석에서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는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근본적인 문제 인식을 가지고 뭔가를 할 때 진짜로 행복해질 수 있죠. 그냥 덮어두고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행복을 얘기하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사회가 그런 상태죠. 그에 대한 전체적인 성찰이 필요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격월간으로 발간하는 『인권』 11·12월호 인터뷰에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한 말이다. 평소 그녀의 탁견에 감동을 잘 하는 편이지만, 이 말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상처’라고 하면 나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늘 나 자신을 통해서도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주 편리한 이중기준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남에게 상처를 줄 때는 둔감해지고, 자신이 상처를 받을 때는 민감해지는 이중 기준이다. 아니 뭐 이건 ‘이중기준’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이중기준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게 아니다. 꼭 필요한 이중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건 공사(公私) 구분에 따른 언행의 차별화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이중기준을 지지한다. 나는 공적인 글로 남들에게 상처를 준 적이 많지만(또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사적 영역에선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한사코 피하려고 애를 쓴다. 물론 인격이 워낙 부실한 탓에 늘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에 당혹스러워지곤 한다. 두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
하나는 공적인 언행으론 남에게 상처를 주기는커녕 아예 비판을 하지 않는데, 사적인 영역에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다. ‘함부로’라고 표현했지만, ‘한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싸가지 없게’가 더 나을 것 같다. 어찌나 싸가지가 없는지 몇 번이나 정색을 하면서 말조심하라는 말을 하려고 마음 먹기까지 했다. 끝내 말을 못한 건 나의 ‘욱’ 하는 기질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그 사람에 대한 ‘과잉 응징’이 될 것 같은 염려 때문이었다.
두 번째 유형은 공사 구분을 전혀 안 하는 사람이다. 이 경우엔 과도한 자기노출을 너무도 쉽게 만들어버리는 인터넷이 원흉이다. 공적인 논쟁을 함에 있어서 사적 관계에서 있었던 일까지 미주알고주알 까발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있다. 좋고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게 전혀 그렇질 않으니 문제다. 나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난 이후 그 사람을 ‘인간말종’으로 여기고 있다. 왜 그렇게 과격한 말씀을?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사적으로 호의를 베푼 일까지 인터넷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데, 내 눈엔 그런 행태가 ‘인간말종’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금 나는 상처의 다양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 나의 독특한 ‘상처 받기’를 거론함으로써, “세상엔 상처의 종류가 다양하구나” 하는 이해를 해보자는 뜻이다. 그래야 “도처에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상처의 사회학’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이다. 즉, 상처를 준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언행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각자 감수성도 다르거니와 상처받기 쉬운 ‘부위’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영어 명언이 있다.
“Don't hold on anger, hurt, or pain. They steal your energy and keep you from love.(Leo Buscaglia) 분노, 상처, 고통에 빠져들지 말라. 그것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훔쳐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 상처에 빠져들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상처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라고 조언하지만, 그건 사실상 “뻔뻔해져라”라는 주문밖엔 안된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독해져서 면역력 키우려다 사람 망가지기 십상이다. 아니 사회도 망가진다.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는 집단적으로 상처 받아 마땅한 일조차 의연하게 대응하는 게 아닐까?
말장난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땐 자신이 알게 모르게 남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게 좋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알고 자위하라는 뜻이 아니다. 각자 감수성도 다르거니와 상처받기 쉬운 ‘부위’가 다르다는 원칙을 확인해보는 것만으로도 ‘상처’보다는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정혜신씨는 “진보의 끝은 인간의 개별화다”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인간의 개별화’가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자주 상처받는 메뉴 중 하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인데, 이 때의 상처는 높든 낮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잠시 잊고 ‘개별화’만 확실하게 돼 있어도 어느 정도는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상처받았던 것도 곰곰 생각해보면 “나를 어떻게 보고!”와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비교문화정신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는 일본인들이 패전(敗戰) 후 전쟁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유물론적 가치관, 즉 물질적 과잉 보상으로 덮어 씌웠다고 했는데, 이게 영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늘 상처 그 자체보다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에 의해 더 큰 문제가 빚어지곤 한다.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는 일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무리하게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즉 “상처는 나의 힘”이라고 외치는 것보다는, 상처를 적정 수준에서 관리하는, 즉 “상처는 내 친구”라고 외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모든 게 다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사회에서 상처 없는 삶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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